대륙의영광을

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정우산기 2006. 12. 15. 12:11
고려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동아시아다

三國統一 직후 新羅가 百濟와 高句麗 땅을 전부 차지했다. 천하고 작은 생선 唐이 차지한 것이 아니다. 百濟, 高句麗 古土를 두고 唐과 新羅가 7 년 전쟁을 벌여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唐을 완전히 몰아냈다(?). 그런데 역사스페셜 6 권에는 買肖城 전투를 이런 말로 시작한다.

현재 중국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역사 지도에는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 지역이 당나라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이 지역을 당의 지배 아래 두려고 백제의 옛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당나라 영토로 보고 현재의 역사 지도를 그린 것이다. 만약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한반도 전체가 당나라 것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드넓은 東아시아를 다 놔두고 韓半島에다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 했다고? 百濟 멸망 전쟁도, 부흥 운동도 전부 중국 대륙 東部와 渤海灣에서 있었다. 韓半島 전라도에 200 여 城이 들어 가는가. 어떻게 200 여 城을 되찾은 부흥 운동이 가능하단 말인가. 본국 땅은 내버려두고, 고작 협소한 韓半島에서 결전을 치루고 復興運動을 하는 인간들도 있단 말인가.

“현재 中國 역사학계가 인정하는 중국의 역사 지도”라 함은 우리나라 사학계의 半島史觀에 맞추어 제작한 지도이다. 우리나라가 自國史를 축소해 대니까 얼씨구나 하고 그에 맞추어서 제작한 것이다. 자기나라 역사에도 無知 하니까 이런 희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熊津都督府와 安東都護府를 설치한 것은 新羅다. 新羅는 東아시아를 다 차지했고 唐은 티벳고원도 아닌,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였다.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이라 그 종족명까지 鮮卑族이었던 유목민이 세운 唐은 韓半島는 구경도 못했다. 新羅를 대상으로 7 년 전쟁을 했다는 기록조차 사실로 보기 어렵다. 新羅에게 “對策은 없고 단지 大國의 처분만 바랄 뿐이다”고 한 唐이었다.


▲ 고려시대의 지명
쌍성총관부는 철령 이북이 아니라 철령 이서, 백제장성 이남에 설치됐다. 이성계가 살았던 곳은 쌍성총관부가 아니라, 고구려가 여진족을 이주시킨 후 대대로 살았던 채달목분지(동녕부)다. 채달목분지에도 고려장성이 지나가고 있다. 이성계는 동녕부의 고려장성 지역에서 살며 삐뚤어진 야망을 키웠던 것이다.
중국왜가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 대마도는 탐라로 불리웠다.


三國 統一 후 곧 大震國이 건국 되었지만, 그래도 新羅는 百濟 영토 일부를 차지했다. 大震國史로 치장한 唐이 순순히 내줄 수는 없으니까, 7 년 전쟁을 날조한 것이다. 7 년 전쟁 역시 순수창작은 아니고, 三國統一 전쟁이나 高句麗 復興運動 등에서 몇 개 슬쩍 빼왔을 것이다.

買肖城은 어디에 있었는가. 唐이 新羅와 7 년 전쟁을 했다는 것은 허구가 분명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지명을 보고, 날조했다. 현 사학계는 臨津江 유역이라 하지만, 臨津江은 淮水다. 티벳고원 북부의 소국이 臨津江까지 와서 三國을 통일한 新羅와 결전을 벌일 수는 없다. 買肖城은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북부에서 가까운 곳에. 金沙江 유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7 년 전쟁이 新羅와 大震國 사이에 벌어진 전쟁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지니고 있다(
復高麗之舊居 有夫餘遺俗 續日本紀)

高句麗는 동북아를 상실했다. 東北亞는 百濟가 차지했다. 中奴가 중국 대륙을 차지 했다면, 大震國이 어떻게 高句麗의 옛터를 회복 했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三國을 통일했을 당시, 新羅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를 뺀 東아시아다. 실로 엄청난 영토다. 잠깐이긴 해도 高句麗 조차 갖지 못한 면적 이었다. 大震國이 高句麗의 古土에서 건국하고 百濟 고토를 新羅와 나눠 가졌다. 이 말은 大震國이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차지 했다는 말이다. 新羅는 중국 대륙 동부를, 大震國은 중부를 가졌기 때문에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영토 곳곳에서 천문관측하고 자연현상을 관측한 나라였다. 揆園史話도 “첨성대는 천 수 백년이 지났다(瞻星臺過千數百年而尙巍巍然特立 漫說)”고 했다. 北崖가 말살되고 은닉된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北崖는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아니다.

500 년에 新羅의 중심지를 韓半島로 옮긴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高句麗와의 전투가 불가능하다. 新羅는 중국 대륙에서 멸망한 나라다. 375 년 新羅는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해 瞻星臺를 세우고 천문관측했다.

927 년 견훤(甄萱)의 군대가 쳐들어올 당시, 경애왕(景哀王)은 11 월(음력)에 포석정(鮑石亭)에서 놀고 있었다. 鮑石亭은 아열대기후 지역에 있었다. 新羅 말기의 수도는 중국 남부에 있는 桂林이다. 慶州에 鷄林이라 부르는 초라한 숲에 鮑石亭이라고 더욱 초라하게 만들어둔 곳이 있다. 李氏朝鮮이 만들었다. 李氏朝鮮은 큰 궁궐은 못 지어도 지명 바꾸고, 날조 내용으로 비석 만드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 짓을 엄청했다. 중국 대륙에는 아직도 계림(桂林)이 있다. 해남도(海南島) 정북으로 5 백 km 쯤이다. 밀린 지명이 아니다. 桂林의 山水는 천하 최고라 했다. 그런 풍광이 여러 곳에 있을 리 없다. 桂林은 金城(武漢)에서 700 km쯤 떨어져 있는데, 李氏朝鮮은 날조 金城(慶州) 안에 鷄林을 갖다 놓았다. 이 역시 전형적인 지명 포개기 수법이다.

三國統一 후 新羅는 당연히 長安城으로 천도 했지만, 大震國에게 長安城을 빼앗기자, 첫 번째 수도 金城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평로치청(平盧淄靑)이 新羅 땅을 상당히 잠식해 金城을 위협했는데, 이 당시에 桂林으로 천도한 것이 분명하다.


▲ 후삼국 시대의 지명


이 당시 신라는 계림으로 천도해 있었다. 수도 금성 근처에서 후고구려가 건국했기 때문이다. 개성은 오늘날의 합비(合肥)다. 무진주(武珍州 전라도 광주로 날조했다)는 오늘날의 홍콩쯤 된다. 신라장성의 위치에 주목하자. 삼국 통일 후 신라는 당연히 장안성으로 천도했지만, 대진국에게 장안성을 빼앗기자, 첫 번째 수도 금성으로 재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평로치청이 신라 땅을 상당히 잠식해 금성을 위협하자, 계림으로 천도했다. 신라가 헌덕제 때 패수 유역에 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신라가 평로치청(761~ 817)에게 한때 금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금성을 회복하자, 금성 방어를 목적으로 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후고구려는 금성 지척에서 일어났다. 이때도 천도했다. 장성의 위치가 후고구려의 근거지와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성을 패수 유역에 쌓았다는 것은 금성의 서북 방향에 쌓았다는 것이다. 후고구려는 금성의 동북 방향에서 일어났다. 신라장성의 위치가 패수 유역이라는 것은 대진국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장성을 축조할 당시는 평로치청이 멸망했기 때문에 신라의 적은 대진국 뿐이었다.


新羅가 헌덕제(憲德帝 41 대 ?~826) 때 浿水 유역에 長城을 쌓았다는 것은 新羅가 平盧淄靑(761~ 817)에게 한 때 金城을 상실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金城을 회복하자, 金城 방어를 목적으로 長城을 쌓았던 것이다. 後高句麗는 金城 지척에서 일어났다. 이때에도 천도했다. 長城의 위치가 後高句麗의 근거지와는 반대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長城을 浿水 유역에 쌓았다는 것은 金城의 서북 방향에 쌓았다는 것이다. 後高句麗는 金城의 동북 방향에서 일어났다. 新羅長城의 위치가 浿水 유역이라는 것은 大震國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長城을 축조할 당시는 平盧淄靑이 멸망했기 때문에 新羅의 적은 大震國 뿐이었다.

高麗는 중국 대륙의 新羅 땅에서 일어난 後三國의 경쟁을 통해 건국한 나라다. 後三國 모두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경쟁할 수 있었다.

高麗史 현종(顯宗)조에 “이 달에 교서 내리기를 高句麗, 新羅, 百濟王陵, 廟堂과 그 소재지 州, 縣에 영을 내려서 수리를 깨끗이 하고, 나무하기를 금하고,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려 가도록 했다(
是月敎高勾麗新羅百濟王陵廟令所在州縣修治禁樵採過者下馬)”고 나와 있다. 皇陵을 李氏朝鮮이 王陵으로 축소한 것이다.

大帝國 高麗가 과연 韓半島에 있는 손바닥 만한 古墳을 三國의 皇陵으로 알았을까. 우리나라 식민지 倭 列島에도 應神이 정착했을 당시부터 거대 고분을 만들기 시작했다. 길이 460 m에, 폭 300 m짜리 고분도 있다. 侯王이 다스리는 나라가 植民母國 보다 더 큰 陵을 만들 수 있는가. 식민지가 길이 460 m에, 폭 300 m짜리 고분을 만들었다면, 上國 百濟와 新羅는, 上國의 上國 高句麗는 대체 얼마나 큰 고분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太白逸史 神市本紀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에 이르러서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
至于高句麗陵墓規制冠於天下)

高麗는 新羅에게서 물려받은 영토를 기반으로 건국한 나라다. 金富軾은 高句麗가 東아시아 태반을 차지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高麗는 高句麗의 계승국이라 천명했던 것이다. 百濟가 渤海灣이 아니라, 韓半島 남부에 있던 나라라고 믿었다면, 百濟는 중국 동부의 新羅와 무수한 전투를 벌일 수 없으므로 三國史記 자체를 쓸 수 없었다. 金富軾은 百濟가 百萬大軍을 보유 했으며 吳, 越, 燕, 齊, 魯 지역을 다스렸다고 三國史記에 기록한 인물이다. 百濟가 4 세기 말까지 東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佛國寺는 528 년에 창건되고, 574 년에 중건을 거쳐서 751 년에 크게 개수했다. 751 년 이전에는 그리 크지 않은 가람 이었다. 751 년 부터 中心地도 아닌 韓半島에다 佛國寺라는 工期가 수십 년이나 걸리는, 경내 면적만 11 만 7541 평에 달하는 대가람으로 개수한 이유는 중국 대륙의 혼란 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수습하려는 염원 때문 이었다. 大震國이 高句麗 땅 대부분과 百濟 땅 일부를, 761 년에는 平盧淄靑이 건국해 新羅 영토 상당부분을 잠식했다.

768 년 부터, 770 년, 775 년, 780 년에는 新羅 지배층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로 皇位 爭奪戰이 이어졌다. 김대성(金大城 : 700~774)이 석굴암(石窟庵)을 창건하고 佛國寺를 중창한 해가 751 년이다. 平盧淄靑이 건국되기 전부터 新羅는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 新羅의 혼란은 百濟와 高句麗가 멸망한 직후 이들 나라 사람들이 復興運動을 하면서 부터 시작됐다.

비록 平盧淄靑도 건국하고 後三國으로 亂立하지만 新羅는 高麗에게 중국 대륙 동부, 남부와 동북아 남부를 물려 주었다. 다무라 엔쵸(田村圓澄)는 百濟 멸망 후 “日本使臣과 學僧들이 唐나라에 다닐 때 新羅 배를 이용했고, 이들이 日本으로 돌아올 때는 반드시 新羅를 경유했다”고 했다. 新羅가 東아시아의 해안을 다 차지했으니까, 新羅 선박에 동승하고, 新羅 항구에서 출발하고 기항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서 唐나라는 大震國이다. 역사왜곡 하면서 바꾼 말이다. 천하고 작은 생선(鮮卑) 唐은 未開 小國이다. 遣唐使를 파견해서 보고 배울 문물이 없었다. 新羅를 피해 唐으로 간 극소수의 高句麗人들이 唐 文物을 이끌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大震國은 대제국이긴 하지만, 이용가능한 해안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大震國의 영토는 시베리아까지 이르렀지만, 해안은 오오츠크(オホーツク)海 이북이다. 大震國의 중심지에서 너무 멀다. 그 외 동아시아의 모든 海岸이 新羅 영토 였으므로 大震國은 항구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日本이 新羅 선박으로 중국 대륙을 오간 것이다.

新羅는 百濟 땅을 大震國과 나누어 가졌지, 新羅 영토는 상실하지 않았다. 왕건(王建 877~943)의 세력기반이 浿西지방 이었다. 浿水는 현재의 漢水이다. 王建이 일어난 곳은 新羅 영토지, 大震國 영토가 아니다. 그랬다면 大震國을 멸망시키고 高麗를 건국했을 것이다. 浿水 하류는 新羅 땅이고, 浿水 상, 중류는 大震國 땅이었다.

759 년부터 몇 년간 日本은 新羅를 치자고 大震國에 제안 했다는데, 이때도 日本은 항해술이고 선박 제작기술이 형편 없었다. 중국 대륙도 新羅 선박에 얹혀서 왕래했다. 그러고는 新羅를 치자고 제안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大震國은 동아시아 제1의 대제국이고 日本은 屬國이라, 新羅를 치자고 제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 옛날 新羅가 百濟 땅 韓半島를 침공 했듯이 日本도 단독으로 新羅 땅 韓半島를 침공하려 했을까. 이 당시 중국 대륙의 新羅 땅에 平盧淄靑이 건국되어 어수선하기는 했다.


▲ 日本三大八幡宮の一つ筥(はこ)崎宮


日本은 新羅를 영원히 칠 수 없었다. 어째서 日本이 신공황후(神功皇后) 전설을 만들고 新羅의 침입을 물리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하코자키궁(はこ崎宮)에 이국항복(伊國降伏)이란 현판(신라가 멸망하기 꼭 10 년 전에 그 짓을 했다)만 다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는지 분명해 진다. 新羅는 일본이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었던 것이다. 韓半島의 소국이 아니라, 중국 대륙의 大國이었다.

그런데도 倭奴는 1945 년 까지 전쟁에 패한 적이 없다고 역사날조하고 있다.

1945 년 9 월 27 일은 일본이 자랑하던 2600 년의 무패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에드워드 베르(Edward Behr)의 ‘히로히토 신화의 저편’에 나오는 첫구절이다. 라이프 2 차 대전에도 나온다. 분명 서양에 소개한 온갖 날조 日本史 책에다 저 말을 써놓았을 것이다].

白江 전투에서 新羅에게 전멸 당한 것은? 제1차 麗蒙 연합군에게 대파 당하고 농성전을 벌여야 했던 것은? 李舜臣에게 7 년 내내 패한 것은? 晉州大捷, 幸州大捷에서 방어군의 10 배가 넘는 병력 으로도 패한 것은? 倭史의 실상이다.

倭奴民族은 언제나 무패 역사에 종지부만 찍고 있었다.

倭奴는 패한 역사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구나! 패한 역사는 다 감추는구나! 얼마나 패배에 시달렸으면, 고작 상상 속에서 적을 물리치기를 기원했느냐? 하코자키궁(はこ崎宮)의 현판 伊國降伏은 왜 쓴 거냐?

神功皇后 전설(日本의 역사는 應神이 倭를 세운 395 년 부터 이므로, 神功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中國倭가 이주해서 日本의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서야 神功皇后 전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神功皇后의 모델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제 남편까지 살해한 악독한 倭奴 여자라고 한다)은 또 무엇인가? 倭奴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니, 귀신한테 新羅를 물리쳐 달라는 게 아니냐? 오죽하면 침입 하지도 않는 新羅를 막기 위해 百濟 멸망 직후 왜(倭)열도에다 서둘러 城을 십여 개나 쌓았는가? 그깟 中國倭 한테도 4 차례나 져서 기모노섹스와 혼욕, 요바이의 난잡한 성문화에 빠져든 倭奴가 아니냐?

그 결과 제 자식과 남의 자식을 구별할 방법이 없어, 천년 넘게 家系가 단절되어 가문해체의 지경에 까지 이른 나라가 日本이다. 배우자가 낳았으니, 내 자식 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나라가 日本이다. 일본의 가계는 핏줄로 이어진 가문이 아니다.

太古 적에 동아시아를 지배 했다고? 그런데 고작 日本 列島에 쪼그라든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쟁에 패한 것이 아닌가? 탐욕스런 倭가 순순히 포기 했다는 것인가? 상상 속에라도 전쟁에 패하지 않고 동아시아를 상실할 수 있는가? 血統조차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 한민족과 75.8%(일본국립유전자협회가 공식인정하는 호라이의 연구이다)나 차이가 나는 倭奴民族이다.

百濟가 中奴와 倭奴를 통털어 漢委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百濟의 기준에 의하더라도 倭奴와 섞인 日本은 더 이상 동아시아를 지배한 한민족이 아니다. 심하게 오염된 유전자를 가진 식민종족일 뿐이다.

미개 中國倭의 저질 문화를 받아들여 國風이라 하고, 후지와라 시대(藤原時代)라고 부르더니만, 고작 한국어에서 받침 떼고 음절을 늘여 日本語까지 만들 더니만(日本語 母體는 韓國語다, 2003. 10. 21, 주간조선), 그래도 한민족이 태고적부터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은 계승하고 싶었는가? 참으로 倭奴의 감정은 모순되고도 복잡하다. 日本에 自生한 민족이고 싶은 동시에 수천 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한민족이고도 싶어 하니까.

倭奴民族은 홋가이도(北海道)의 아이누族도 1869 년 부터 치열한 전투 끝에 간신히 정복하지 않았는가? 그것조차 메군(米軍)이 南北戰爭 당시 입고 사용했던 골동품 군복이며, 총기로 무장하고 정복한 것이 아닌가?

2600 년 동안 패하지 않는 역사를 가진 민족이 어떻게 일찌감치 세계정복은 못했더란 말인가. 蒙古도 하고, 匈奴(훈족)도 하고, 靺鞨(突厥)도 유럽까지 그 영토를 넓혀 나가지 않았던가. 욕심만 무한대인 倭奴가 어째서 고작 19 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세계정복을 꿈꾸었단 말인가.

倭奴 치켜 세우기에 정신없는 西洋人들은 이런 것을 實證史學이고 客觀的 證據라고 부른다. 그래도 자신들에게 얽힌 것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 그래서 2 차 대전도 일본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倭奴의 無敗歷史가 2600 년에서 끝장난 것이다, 우리나라와 붙었다가 패했으면, 아직도 倭奴史는 무패 행진 진행 중이다.

日本의 날조 역사는 이처럼 하나같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2600 년의 역사라는 것조차 거짓말이다. 日本의 역사는 395 년 應神이 列島에 도착한 때로부터 시작됐다. 이전에는 나라가 없었다. 1600 年史에 불과하다. 하물며 1945 년에는 1500 年史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日本史마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개하기 짝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日本은 고작 중국 대륙 남부에 있던 中國倭를 종이 위에서 슬쩍 끌고 와 韓半島 남부로 갖다 놓고 任那日本府니, 三國을 지배 했다느니 헛소리를 늘어 놓지만, 漢委奴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사실은 숨기기 위해 中國倭와의 전쟁도 아이누族과의 전쟁으로 날조했다. 中國倭가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中國倭도, 日本倭도 다 우리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中國倭조차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하기 전에는 나라가 없었다. 촌락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베낀 三國志에도 倭國이 아니라, 왜인조(倭人條)라 했다. 그래서 5 세기 초 부터 부지런히 高句麗에 사신을 보낸 끝에 5 세기 말 倭를 통합한 大將軍이 되고 倭王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던 것이다.
 
高麗가 대제국 이었음은 高麗圖經, 高麗史, 해동역사[海東繹史, 경인문화사 간행 해동역사 하권 627 쪽 기록 해동역사 속권 제 10(海東繹史 續卷 第 十) 烈水 韓致奫 術(열수 한치윤 술) 지리고 10 (地理考 十) 高麗 一 彊域總論] 뿐만 아니라, 太白逸史에도 나온다. “우리 천수(天授) 太祖(王建)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高句麗의 多勿이 나라를 세운 풍도(風道)를 계승 하였다(我天授太祖以創業之資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단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다. 高麗는 多勿의 國是를 계승했고, 李氏朝鮮은 이를 감추었던 나라다. 李氏朝鮮은 高麗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 받고도 온세상의 평정은 커녕, 우리나라 5 천년의 속국한테 다 떼어주고 끝내 韓半島로 찌그러 들었다가 망한 濊貊族의 나라다. 역사말살까지 해가며 미개 소국 明을 문명대국으로 만들어준 濊貊族의 나라다. 자신이 창작한 문명대국 明만이 아니라, 淸에까지 굽실대던 濊貊族의 나라다.

高麗는 대제국 이었다. 몽고간섭기(?)에도 黃河 이남과 東北亞를 영토로 한 大國이었다. 蒙古의 영토라고 알려진 땅의 4 분의 1은 高麗 영토였다. 이 시기 티벳고원 북부의 중국은 나라 자체가 망했다.

高麗가 고작 손바닥만한 韓半島를 통일하느라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이 타협했던가. 우리나라 수천 년의 피지배종족 匈奴도, 蒙古도, 靺鞨도 서유럽까지 제패했다. 그런데 이 땅의 사학자들은 우리가 고작 韓半島를 통일하는 것조차 버거워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이 타협을 했다고 한다.

서양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차지한 蒙古가 고작 韓半島 북쪽 끄트머리에 연연하여 두 곳에다 행정기관까지 설치했던가. 그 인력으로 서양을 계속 정복하면,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한다는 것은 蒙古가 더 잘 안다. 서양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있었는데, 고작 손바닥만한 東鴨綠 강변에 그토록 강한 애착을 가진단 말인가. 굶어죽을 뻔한 소국 唐조차 百濟 땅에는 熊津都督府를, 高句麗 땅에는 安東都護府를 설치 했다고 날조했다. 유라시아를 대부분 차지한 蒙古가 고작 白頭山 일대에 행정기관을 둘씩이나 설치해 지배했단 말인가. 고작 濟州島에 耽羅總管府를 설치하고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었단 말인가. 편자 같으면 콘스탄티노플에 總管府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두겠다. 날조 蒙古帝國에 비하면 韓半島는 완전히 점에 불과하다.


▲ 몽고간섭기의 동아시아


쌍성총관부, 동녕부, 8 참(첩), 거란 수비지역 모두 사한국이 아니라 몽한 땅이다. 몽고고원에는 오고타이한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종이 몽고고원으로 도주해 몽한의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에서 몽고고원은 몽한의 직할지로 추정된다. 어쨌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의해 고려는 장성 이남과 동북아로 완전히 분단된 것이다. 몽한은 元으로 날조된 나라의 원래 국명이다.


蒙古가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 했다면서 고작 韓半島를 정복 하고자 40 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는 것인가. 蒙古가 韓半島에 눈독 들이지 않았으면, 서유럽도 정복하는 것인데, 蒙古만 몰랐던가. 우리나라가 지지리도 작은 小國 이라면서 어째서 이럴 때만, 우리나라의 가치를 무한대로 상승 시키는지 모르겠다. 東寧府와 雙城總管府, 8 참(八站)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우리나라가 강대국이라 蒙汗의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高麗가 韓半島 뿐인데, 蒙古가 청야전술(淸野戰術)로 타격을 받을 수 있는가. 고작 수백 km를 비웠다고 군수품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蒙古는 서방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없었다. 중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도 사막이 넓게 펼쳐져 있다. 징기스칸(成吉思汗)이 蒙古高原을 통일하고 黃河 이북도 싸워서 얻었다니까, 고비사막이나 오르도스 사막에서도 전투를 한 셈이다. 날조 蒙古帝國에 비해 韓半島는 인체로 비유하면, 얼굴도 아니고 한쪽 귀에 불과하다. 蒙古가 韓半島를 침입 했다면, 韓半島 내에서 군수품 조달이 불가능할 경우, 韓半島 이북에서 조달하면 된다. 그러나 高麗는 淸野戰術 조차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蒙古가 高麗를 침입하지 않아서.

西方에는 이슬람인을 다루가치(達魯花赤)로 두고, 高麗 땅에는 한때 西京(?)과 西北面 지역에만 72 명의 蒙古人을 다루가치로 두었다? 유독 韓半島 북부, 그것도 서쪽에만 72 명의 몽고인 행정관을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蒙古에게 西京(?)과 西北面 지역이 중요했던 이유는 高麗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이다.

高麗는 전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건조한 나라다(小右記). 동아시아의 무역대국 高麗의 수도 開京은 국제적인 무역도시였다. 수많은 외국상인과 사절로 붐비고 이들이 묵는 10 여 개의 객관은 궁궐만한 규모라 했다.

貿易大國 高麗는 동아시아를 넘어 인도, 아라비아 등과도 교역했다. 이해 하겠지만 이 당시 유럽은 너무 미개해서 高麗의 교역 상대국이 될 수 없었다. 메국(米國)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콜럼버스 조차 수백 년 뒤의 사람이다.

高麗는 무역에만 힘쓴 게 아니고 高句麗를 계승했다는 자부심으로 잃어버린 옛 땅 회복에 나섰다. 高麗의 火藥과, 走火(로켓), 大砲를 체험한 中奴는 이것마저 훔치기에 나섰다. 走火를 모방해 만든 것이 비화창(飛火槍)이다. 宋이 아니고, 金汗이 만들었다. 金汗을 세운 濊貊族이 柴達木盆地에 있으면서 高麗의 走火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高麗는 濊貊族도 병사로 활용했을 것이다. 蒙古가 金汗의 수도 변경(邊京)으로 쳐들어 갔을 때 邊京의 수비군이 高麗의 走火를 모방한 飛火槍으로 대항했다. 이후 蒙古는 유럽을 침공 하면서 金汗에서 입수한 로켓무기를 사용했다.

최무선(崔茂宣 ?~1395)이 중국으로 가서 화약제조법을 배워 왔다고? 중국 대륙이 高麗 영토의 일부이다. 崔茂宣이 염초 제조법을 中奴 그것도 100 % 유목민족 蒙汗人 이원(李元)으로부터 배웠다고? 염초(焰硝)는 4700 년전, 배달 14 世 慈烏支 한웅 때 벌써 만들었다. 高麗人 李元이 中土에 가서 焰硝製造法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것으로 中奴도 화약 무기 비슷한 걸 만들었다. 高麗의 화약무기가 중국으로, 다시 蒙古로 전해진 것이다. 蒙古는 高麗의 화약 무기로 세계를 정복했다.

高麗는 權門世族의 나라였다. 이들 권문세족들은 山川을 경계로 삼은 거대농장을 소유했다. 농장에 마당 장(場) 자도 아니고 장전 장(莊) 자를 썼을 정도로 거대했다. 황실 소유의 농장은 360 개에 달했다. 대체 손바닥만한 韓半島에 그 땅들이 다 들어갈 수나 있는가.
 
하음(河陰), 진강(鎭江), 해령(海寧)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왕, 재추(宰樞) 이하 차별을 두어 분급(分給)했다(河陰鎭江海寧之田分給諸王宰樞以下有差 高麗史節要)

高麗는 諸侯, 諸王까지 거느린 皇帝國이었다. 날조사에서 高宗 44 년은 麗蒙戰爭의 막바지 라면서? 高麗 전기도 아니고, 이 당시에도 諸侯, 諸王이 있었다. 高麗는 실상 몽고간섭기(?)에도 제왕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開城에 高麗의 궁궐터가 있다고? 현 開城에 있는 궁궐터는 高麗 諸王의 王城터이다. 의종(毅宗 1127~1173)이 직접 썼다는 글에 “日本이 보물을 바치며 毅宗을 皇帝라 불렀다”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역사스페셜 4권). 이상한 글이다. 毅宗이 직접 썼는데, 자신을 毅宗이라 그러고. 毅宗이 王에 불과 했다면 이렇게 썼다. “日本이 보물을 바치며 나를 皇帝라 불렀다.” 高麗는 東아시아의 유일한 皇帝國이었다. 그러니까 日本이 조공을 하면서 황제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로부터 65 년 뒤에는 왜구(倭寇)가 출몰해서 高麗 땅에서 노략질을 하기 시작 했다는데...... 日本은 上國으로 섬겨온 高麗에서 온갖 잔학행위를 시작한 것이다.

◀ 최무선 영정

주목할 점은 倭寇가 중국 대륙을 노략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韓半島만 노략질했다. 高麗의 역사는 宋에 배당되었다. 倭寇가 16 세기에 明을 노략질하던 광경을 그린 왜구도권(倭寇圖券)이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에 소장되어 있다. 倭寇가 약탈한 明의 유물도 對馬島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宋을 노략질 했다는 기록이나 宋의 유물로 날조된 중국 대륙에 있던 高麗의 유물은 日本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倭寇는 중국 대륙이 아니라 韓半島를 노략질한 것이다. 崔茂宣이 倭寇 500 척의 대선단을 격파했다(?)는 진포대첩(鎭浦大捷)과 李成桂(?)가 지휘했다는 황산대첩(荒山大捷)은 韓半島에서 일어났다. 실상 鎭浦도, 荒山도 아니었던 것이다.

日本은 중국 대륙이 아니라, 韓半島에 있던 高麗 諸王에게 朝貢을 했다. 高麗 시대에도 중국 대륙을 오갈 능력이 없었다. 日本은 高麗 제왕에게 조공하며 皇帝라 불렀던 것이다. 그 말이 너무 웃겨서 적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高麗를 韓半島의 나라로 축소시켜 놓았으니까, 日本이 조공하는 제왕을 둘 수 없고, 그래서 毅宗을 皇帝라 불렀다고 바꿨다. 일본은 1019 년 韓半島의 제왕이 파견한 高麗 함대에 정복되었을 때부터 韓半島에 조공했다.

기원전 65 년경에 그렸다는 기토라(キトラ) 고분 벽화 천문도에 의해 韓半島는 百濟 이전부터 북위 38.4° 에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주극원의 크기에서 李氏朝鮮 초 까지도 북위 38.4° 에서 천문관측 해왔음이 밝혀졌다. 북위 38.4°는 한반도의 고정적인 천문관측 지점이었다. 高麗 시대에도 당연히 북위 38.4°에서 천문관측했다. 그래서 최적 일식관측지와 韓半島를 다스리는 高麗 제왕의 궁궐 위치가 일치하지 않았다.

高麗의 도읍은 高句麗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도읍이고 大震國의 도읍인데, 韓半島에는 平壤城이라고 날조한 장소에서 떨어진 곳에 高麗 제왕의 궁궐이 있다 보니까, 遷都 사실을 감추고 高麗時代 내내 太祖 王建의 고향 開城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날조한 것이다. 高麗는 新羅 땅에서 건국해 大震國 古土를 회복한 나라이다. 大震國의 平壤城을 회복한 후, 당연히 우리나라 제1 황성인 平壤城으로 천도했다.

開城이 王建의 고향 이었는지도 심히 의심 스럽다. 王建은 浿西세력을 기반으로 高麗를 건국했다. 後三國의 경쟁은 新羅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浿西地方 이라고는 하지만, 浿水 하류만을 가리킨다. 문제는 浿西와 開城[Asia 1808에는 開城이 合肥 내지 신양(信陽)으로 표시되어 있다]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이다. 王建이 開城을 기반으로 일어났으면, 浿東은 될지언정, 浿西는 될 수 없다. 王建의 부친(隆)은 금성태수(金城太守)니까, 王建은 開城세력이 아니라 浿西세력을 기반으로 高麗를 건국한 것이 확실하다. 開城에서 태어나서 金城太守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와 金城(武漢)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開城이 開京이라고 날조하기 위해 王建의 고향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開城의 궁궐터에서 봉황무늬가 새겨진 기와막새가 출토되었다. 韓半島(혹은 동북아)를 다스리던 諸王은 高麗의 皇族 이었던 것이다. 高麗 皇族은 蒙汗에 볼모로 갔다고? 高麗를 침략하지도 못한 蒙古가 무슨 수로 高麗의 황족을 줄줄이 끌고 간단 말인가.

倭寇가 강탈해간 高麗 佛畵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 및 관경변상서품도(觀經變相序品圖)에는 韓半島의 고려제왕이 살던 궁궐이 그려져 있다. 옛날에는 사진이 없었으니까, 高麗人이라도 중국 대륙의 長安城 근처에 살지 않으면 高麗 皇帝가 사는 궁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韓半島에 있는 장인이 만든 彌勒下生經變相圖, 觀經變相序品圖에는 韓半島에 있던 高麗 제왕의 궁궐을 그려 넣은 것이다.

高麗의 궁궐은 高麗 末 紅巾賊의 침입으로 불탄 이후 다시는 제 모습을 찾지 못했다고? 참 편리도 하네. 大震國의 長安城도 불탔다고 하더니, 우리나라는 궁궐도, 역사책도 모조리 불타는군. 아무 것도 불탄 게 없다. 大震國의 황성도, 高麗의 황성도, 大震國의 역사책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날조 高麗史에는 江華 천도 당시, 開京의 호수가 10 만 이라고 했다. 開京은 長安城이다. 그런데 겨우 10 만? 開京에는 외국 사절과 상인들이 묵는 객관도 궁궐만한 것이 10 개라고 했다. 그런 곳에 고작 10 만호만 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南北國 時代 新羅의 수도 桂林(鷄林)에도 17 만 8 천 9 백 36 호가 살았다고 했다. 그나마 桂林에는 新羅 귀족과 부유층만 모여 살았다. “47 대 憲康王 때 성 중에 초가집이 없었고 처마가 서로 맞붙고 담장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今之民間 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 三國史記).”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統一王朝이자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한 高麗의 開京에는 몇 가구가 살아야 하는가. 6 세기 초 百濟의 인구는 4600 만 명이었다. 高句麗와 新羅도 있다. 高麗의 인구는 2 억을 상회했을 것이다.
일본의 쇼유키(小右記)를 보면, 1019 년에 벌써 우리나라 에서는 大砲를 장착한 전함을 만들어 실전에 배치하고 있었다. 화약과 전함의 개발은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라 절대 高麗가 누락시켰을 리가 없다. 火藥을 발명하고, 화전(火箭), 화구(火毬), 질려포(翐藜砲), 비화창(飛火槍)을 개발했다는 宋이 전쟁만 했다 하면, 여지없이 박살이 났다. 遼汗, 西厦, 金汗을 거쳐 결국 蒙古에게 망했다. 火藥은 宋이 발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발명했다.

火藥은 장식품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倭도 위협했던 것 아닌가. 高麗는 무력에 있어서도 강력한 나라였고, 이런 나라이니 만큼 失地 回服에 나선 것은 당연하다. 高麗가 黑龍江 유역 혹은 그 너머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일본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인당(印璫) 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 참(八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印璫崔瑩等諸將攻鴨綠江以西八站破之 太白逸史)

여기서도 ‘鴨綠江 以西’라고 했다. 江東六州가 방위와는 상관없는 명칭이라는데, 그렇다면 江의 以西, 以東, 江의 以南, 以北도 바꾸어 말한단 말인가. 동쪽하면, 서쪽으로 알아듣고, 북쪽하면 남쪽으로 알아 들었단 말인가. 高麗 때는 동쪽이 남쪽이었고, 북쪽이 서쪽이었던가.

江東6州는 西鴨綠江(嘉陵江)에 위치했다. 그래서 江의 동쪽 6州가 된 것이다. 太祖 王建이 西京을 중시하라 유시하고, 4 代 光宗이 西鴨綠江 밖의 濊貊族을 柴達木盆地로 내쫓았는데, 6 代 成宗 때 어떻게 거란이 高麗 영토인 西鴨綠江 이동을 줄 수 있는가.

江東 6州를 설치한 것은 成宗이 아니라 太祖이다. 지금의 鴨綠江에서 어떻게 江東 6州를 확보하는가. 수도 없이 高麗史를 날조 하면서도 李氏朝鮮은 江東 6州를 미처 江南 6州로 고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西鴨綠江이 사라진 것은 대대적인 高麗史 날조가 끝나고 한참 후인 肅宗 때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축소는 李氏朝鮮 내내 계속됐지만, 南北으로 흐르는 西鴨綠江이 사라졌으니 江東 6州를 고쳐야 한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날조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수월관음도 일본에 있는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 영토를 韓半島로 축소시키기 위해 生女眞을 종이 위에서 新羅 말, 高麗 초에 南下시키고 熟女眞을 柴達木盆地에서 동쪽으로 끌고 왔다. 高麗 말, 李氏朝鮮 初라고 하지 않은 것은 물론 濊貊族이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다. 熟女眞(滿州族)의 나라 金汗을 生女眞이 세운 나라라 날조한 것은 後代의 일이다. 生女眞은 李氏朝鮮에 조공하고 있었다고 高麗史와 李氏朝鮮實錄에 실려 있다. 생여진도 李氏朝鮮의 억압 및 차별, 멸시에 분연히 봉기해서 明을 정복하고 淸을 세웠던가.

高麗의 수도가 韓半島 開城이라면, 黑龍江 상류의 생여진을 정복한 高麗는 절대 東北九城을 둘 수 없다. 北九城을 설치해야 한다. 高麗는 滿州에서도, 黑龍江에서도 일식관측한 나라다. 李氏朝鮮도 1599 년 까지 滿州에서 일식관측한 것이 일본 역사책에 남아 있다.

東北九城은 반드시 高麗의 동북쪽에 위치해야 한다. 江東六州는 반드시 강의 동쪽에 위치해야 한다. 5 천년 천문강국이, 책력까지 중국에서 갖다 썼다고 날조 당하면서 방위라도 정확해야지, 그것마저 포기하면, 천문관측은 취미활동이었나.

高麗의 영토는 여러 책에 나와 있다.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遼海)에 막혀 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금나라 그리고 일본, 유구, 탐라, 흑수, 모인(毛人) 등의 나라에 접해(距;떨어져) 있다[高麗南隔遼海西 距夭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 海東繹史(烈水 地理考 高麗 疆域總論)]

고려는 남쪽으로 요해에 막혀 있고, 서쪽으로 요수에 접하고,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하고,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아 있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다(高麗南隔遼海西距夭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 高麗圖經)

高麗圖經이 원출처이다. 高麗의 강역을 기술한 저 대목 역시 슬쩍 고친 날조기사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저 기사가 高句麗 영토에 대한 기술이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高麗가 新羅를 계승 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遼나라와 金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鴨綠江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自有甚於古者矣 揆園史話)."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高句麗라면, 金汗이 있을 리 없다. 金汗은 1115 년에 세워진 나라다. 高句麗는 동북아를 상실했다. 高麗圖經은 高麗에 대해 기술한 책이었던 것이다.

우선 高麗의 영토가 “일본·유구·탐라·흑수·모인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으려면, 반드시 중국 대륙과 韓半島 이북에 땅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韓半島 뿐인데, 어떻게 日本·流球·耽羅·黑水·毛人 등의 나라와 犬牙相制(개 이빨 형상)가 되겠는가.

遼水는 오늘날의 遼寧城에 있는 遼水가 아니다. 嘉陵江을 말한다. 李氏朝鮮 初에도 遼水는 桑乾河였다. 그리고 遼西도 高麗 땅이다.

高麗는 “남쪽으로 遼海에 막혀 있다(高麗南隔遼海)”에서 遼海는 발해만이다. 高麗의 영토가 韓半島고 遼海가 남해라면, 황해, 동해로는 안막혔는가. 遼海가 황해, 동해가 아님은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지도를 고쳐서 지명을 밀어낸 중국 고지도에는 한반도를 아예 생략했다.
 
1824 년에 遼水로 돌변한 현 遼水는 遼汗(916~1125)하고 전혀 관계가 없다. 우선 淸이 날조한 지리도에는 遼汗 때의 遼水가 난하(灤河)라고 표시되어 있다.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 黑龍江 이북에서, 1343 년에서 1599 년 까지 滿州에서 관측한 우리나라 일식을 일본이 베꼈다. 물론 遼汗은 발해만을 차지해본 적도 없다. 遼汗이 차지한 大震國의 동북아 영토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渤海는 국명이 아니다. 大震國이다. 따라서 大震國의 바다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라면, 大震海라고 불렀을 것이다. 오늘날의 오오츠크해가 大震海로 추정된다. 시베리아가 大震國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三聖紀全 上篇에서도 渤海灣을 遼海라 했다. “衛滿이 몰래 서쪽 변방 한 모퉁이에 살았는데, 番韓의 準이 그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바다에 들어가 망하였다. 이로부터 三韓의 무리는 거의 漢水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衛滿竊居西鄙一隅番韓準爲戰不敵入海而亡自此三韓所率之衆殆遷民於漢水之南一時群雄競兵於遼海之東).”

李氏朝鮮의 시각에서 우리나라 강역을 韓半島와 그 이북으로 축소한 날조기사다. 그래서 고작 우리나라 영웅들이 渤海灣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다. 安含老의 三聖紀全은 實史에 날조사[“丙辰年, 周나라 考王 때(丙辰周考時)” 이후)를 덧붙인 글이다. 축소시킨 강역으로 보건데, 遼海를 발해만으로 바꿔 부른 것은 李氏朝鮮이 발해만을 상실한 18 세기 쯤일 것이다.

거란의 옛 땅이래야 중앙아시아고, 캐시미르를 통해 들어온 티벳고원 북부의 서쪽이다. 티벳고원으로 들어와 있다가 나라를 세워 티벳고원 북부를 일부(宋)만 남기고 다 차지했다. 중요한 것은 大震國 까지 멸망 시켰다는 사실이다 高麗圖經을 쓴 시점에서는 거란은 高麗에 의해 3 차례나 격파되어 中土 내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高麗는 大震國의 古土를 전부 회복 하지는 못했다. 武臣政變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武臣이 정권을 잡았으니, 국방이 강화되겠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개인의 이익 외에는 관심이 없는 집단 이었다. 거란의 옛 땅이란 高麗가 회복하지 못한 大震國 古土이다.

거란이 한 때 大震國을 멸망 시켰으나, 그것은 거란이 강해서가 아니고, 大震國이 내부분열로 한없이 나약해졌기 때문이다. 12 세기 이전부터 거란도 遼汗이라는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金汗은 강성한 遼汗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高麗의 침공으로 겨우 명맥만 남아 있는 遼汗을 멸망 시켰던 것이다.

“동쪽은 金나라와 맞닿아 있다(東距大金)”는 말은 명백한 왜곡으로 金汗은 高麗와 서쪽으로 맞닿았다. 柴達木盆地에 살던, 高麗의 속민 숙여진은 高麗의 허가를 구하고 中土로 들어가 金汗을 세웠다. 그러므로 金汗의 太山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동쪽으로는 金에 접해 있다.”고 날조한 이유는? 우리나라 강역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도저히 못 찾으면 날조 中奴史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다.

유구(流球)는 류큐다. 지금의 오키나와(沖繩)로 일본과 대만 사이에 있는 섬이다.

탐라(耽羅)는 제주도가 아니다. 耽羅가 제주도라면, 日本을 쓸 필요가 없다. 또 耽羅가 제주도라고 한다면, 對馬島도 써야 하지 않는가. 耽羅는 臺灣이다. 하지만 耽羅는 高麗 영토였다. 高麗圖經 자체가 완전히 날조됐다.

三國志는 3 세기의 東夫餘를 설명하면서 “남쪽 으로는 高句麗와 동쪽은 挹婁와 서쪽은 鮮卑와 접하고 있다.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고 날조했다. 東川帝가 242 년 西安平을 공략했다. 이 당시 西安平은 遼西에 있지만, 날조 역사책에는 遼東 이라고 나온다. 날조사에서 이 당시 高句麗는 吉林市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東夫餘는 동북평원에 있었던 셈이다. 東北平原 북쪽에 弱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三國志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 쓴 책이라는 점에서 弱水는 中土 북쪽에 있었다. 東北平原 북쪽에는 黑水가 있었던 것이다. 남쪽 高句麗와 동쪽 挹婁와 서쪽 鮮卑와는 ‘접’한 반면, 북쪽의 弱水는 접했다는 말이 없는 것은 날조 東夫餘 영토가 黑水와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中土도 弱水와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었다.

大震國도 黑水靺鞨을 비롯한 대부분의 靺鞨 세력을 복속 시켰다. 그런데 동북아는 3, 4 세기 이후 百濟 영토였고, 百濟 영토는 大震國과 新羅가 분할했다. 新羅가 중국 대륙 동부에 있었으므로 동북아 남부는 新羅, 북부는 大震國이 가질 수밖에 없다. 蒙古高原이 중국 대륙 동부를 가진 新羅의 영토라면, 大震國은 동북아로 줄어든 百濟 땅을 한 줌도 차지할 수 없을 뿐더러,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할 수도 없다.

영토도 자연지형을 기준으로 나눈다는 점에서 大興安嶺山脈 이남은 新羅, 이북은 大震國의 땅이다. 日本이 베낀 710 년에서 792 년 사이의 일식기록을 보면, 몽고고원 이북에서 黑龍江 상류가 빠지고, 黑龍江, 중, 하류 유역 너머(스타노보이산맥)가 일식관측지로 나온다. 黑龍江 중, 하류는 新羅 영토지만, 중, 하류 저편은 大震國 영토다.

高麗史에는 “女眞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고 했다. 저 글만으로는 西女眞인지 東女眞인지 애매하다. 高麗의 서쪽인지, 女眞의 서쪽인지 적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西女眞은 高麗의 수도 지척에서 거주하는 탓에 수시로 와서 조회 해야지, 몇 번만 조회할 수가 없다.

黑水女眞은 거란과 高麗를 동시에 섬긴 것이 아니라, 거란과 영토를 접했을 때는 거란을, 高麗와 영토를 접했을 때는 高麗를 섬겼다. 大震國이 거란한테 멸망하고 나서 거란이 차지한 大震國의 영토를 高麗가 탈환했다.

大震國은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했다. 국경지대에서 천문관측하는 나라는 없다. 新羅와 高麗가 黑龍江 중, 하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것은 黑龍江 중, 하류 너머도 우리나라 영토라는 의미다. 高句麗가 黑龍江 상류에서 일식관측한 시기는 2, 3 세기 까지이고, 이 당시는 生女眞이 黑水로 이주하기 전이다.

生女眞이 新羅가 아니라 大震國에 복속했고, 黑龍江 상류가 大震國 일식관측지(일본이 베낀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에서 빠졌고, 이후에도 黑龍江, 중, 하류에서 일식관측(일본이 베낀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했다는 사실에서 黑水女眞이 거주 했다는 黑水는 黑龍江 전체가 아니라 黑龍江 상류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黑水가 내내 우리나라 국경선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쪽은 창해, 서쪽은 요서, 남쪽은 남해, 북쪽은 서비로에 이르렀다(檀奇古史)

2 世 檀君 扶婁 당시의 국경이라고 하나, 神人王儉 당시의 국경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술했다. 여기서 문제는 그것이 아니고, 西毘盧가 시베리아라는 설이다. 日本이 베낀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 大震國의 일식관측지가 시베리아인 걸로 보아, 한때 시베리아가 우리나라 영토였던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냐는 것이다. 高句麗의 일식도 黑龍江 상류에서 관측했다. 黑龍江 상류 너머가 우리나라 땅이니까, 그곳에서 천문관측할 수 있었다. 高句麗 이전부터 우리나라 영토는 시베리아를 일부 혹은 전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시베리아를 일부만 차지 했다면, 西毘盧가 아니라, 南西毘盧라고 하지 않았을까.

대저 구한(九桓)의 족속은 나뉘어 5 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 백부의 사람(白部之人)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다(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貌爲別也皆其俗就實究理策事而求其是則同也......白部之人皮膚晳頰高鼻隆髮如灰 太白逸史 三神五帝本紀)

白部人에 대한 설명은 白人種을 가리킨다. 오늘날 시베리아는 白人種과 혼혈이 많이 이루어 졌지만, 古시베리아인은 黃人種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古考學 ·言語學 등에 의하면 슬라브족의 조상은 고대에 아시아로 부터 이동하여 3 세기 까지 적어도 1000 년 이상 카르파티아산맥(Muntii Carpati) 북방의 비스톨라江 유역에서 드네프르(Dnepr)江 유역에 걸치는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고도 한다.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사는 白人은 7 세기 이후 이주한 아랍인이다. 西투르키스탄(Turkestan) 북부의 철도 연변에는 슬라브族이 살고 있다. 이주민일 것이다. 어쨌거나 저 기사는 朝鮮의 강역 어딘가에 白人이 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朝鮮의 강역이 서남아시아에 이르렀다면, 후대에 강역이 축소 되었다는 뜻이다. 바이칼호 일대는 우리민족이 살았으므로 白人은 북시베리아에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朝鮮에서 北夫餘로 또 다시 高句麗로 이어지는데 무력 사용은 없었다. 시베리아를 상실할 이유가 없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黑龍江 상류이다. 시베리아는 高句麗 영토였던 것이다.

柴達木盆地에 눌러앉은 숙여진과 마찬가지로 黑水女眞도 우리나라 영토 내에 주저 앉았다. 유일한 선택이었다. 新石器人처럼 떠돌며 살았던 전투력이 없던 黑水女眞 으로서는 우리나라 영토 바깥으로 나가 남의 나라 영토를 확보할 수가 없었으니까. 黑龍江 상류에 눌러앉은 黑水女眞을 내버려둔 것은 이 시기에 高句麗가 동북아 북부를 상실 했거나 黑水女眞도 百濟의 침공을 방어하는데 활용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때문이다.

高麗圖經은 책 전반에 걸쳐 날조된 책이다. 高麗의 강역에 대한 기술조차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高麗가 遼水에 접했다는 것이나 金汗이 高麗의 동쪽에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러나 高麗 이전에 黑水 이북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高麗圖經은 원래 高麗人이 쓴 책을 뜯어 고쳤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를 상실한 시기는 大震國이 멸망했을 때다.

大震國 영토가 거란에게 넘어 갔지만, 시베리아는 거란의 지배에서 독립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식기록상 黑龍江 중류 이북은 여전히 高麗 영토다. 거란이 차지한 大震國의 고토를 찾겠다는 것이 高麗의 北伐政策 이니까, 시베리아 회복도 포함 되었지만, 武臣政變이 일어난 후에는 북벌정책도 폐기 되었다. 武臣政權은 개인적 이익 외에는 蒙古가 취한 高麗 땅을 탈환할 의지도, 古土 회복 의지도 없었다. 高麗가 시베리아를 탈환하지 못했으니, “高麗는 북쪽으로 거란의 옛 땅에 접한다(北接契丹).”

高麗圖經을 高麗人이 썼다는 점에서 原文은 이렇다.

고려는 북쪽으로 대진국의 옛 땅에 접한다.

毛人은 홋가이도(北海道)가 아니다. 왜냐하면 日本[日本은 메이지(明治) 때 홋가이도를 정복했다]의 바로 지척에 있기 때문에 굳이 연달아 밝힐 필요가 없다. 사할린(サハリン) 섬이다. 日本이 베낀 794 년에서 1184 년 까지의 우리나라 일식의 최적관측지가 사할린의 맞은편이다.

日本, 流球, 耽羅, 黑水, 毛人이 섬이나 강이라서 高麗와의 사이에 바다 내지 물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떨어질 거(距)를 사용했던 것이다. 高麗圖經의 글이 사실이면, 高麗 영토는 스타노보이(Stanovoy) 山脈 까지이다.

1421 년 아메리카를 발견한 정화(鄭和, 1371~1435)함대는 明이 아니라, 高麗의 함대이다(후대의 이씨조선의 태종조와 세종조에 해당된다). 아무리 우리나라로 기어들어 왔다고 해도 明은 曆法조차 만들지 못해 授時曆을 베껴서 大統曆이라 한 나라다. 明, 淸과 李氏朝鮮으로 분할된 이후 한문명은 퇴보를 거듭했다. 한문명은 高麗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했다. 高麗는 세계 최고의 造船術과 航海術을 보유하고 있었다. 1421 년은 新羅가 東中國海를 건너 韓半島를 침공한 지도 千年이 넘었을 때다.

그러나 시베리아를 상실한 高麗 때 이르러 아메리카 탐험을 나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정말 高麗는 “黑水·毛人 등의 나라와 犬牙相制 모양으로 되어 있”(高麗圖經)었을까. 사할린 너머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을까. 高麗의 영토가 추코트반도(Chukot Pen)에 이르러야 영토 끝에 서서 베링해를 바라보며 그 너머의 대륙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中國은 高句麗도 高麗라 부르기도 했다면서 高麗圖經 속에 高句麗에 대한 기술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高麗圖經은 宋人이 아니라, 高麗人이 쓴 책이다. 날조 하면서도 高句麗와 高麗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그래서 高麗圖經 1 권에서 “高麗의 선조국 高句麗를 漢나라의 현토군으로 예속시켰다.”라고 날조 漢四郡을 더욱 발전시켰다.
乙酉 2 년(B.C. 1236)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고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의 땅을 평정 하였다(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 檀君世紀)
부소(夫蘇)와 부우(夫虞) 및 작은 아들인 부여(夫餘)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夫蘇夫虞及少子夫餘皆封于國西之地句麗眞番夫餘諸國是也)부여후(夫餘侯)가 설유(稧兪) 때문에 어려움을 치르자 웅가(熊加)와 구려후(句麗侯) 및 진번후(眞番侯) 등이 도와서 이를 평정하였다(夫餘侯有稧兪之難熊加與句麗眞番侯助平之)
구려후(句麗侯)인 우타(于佗)가 들어와서 용가(龍加)가 되었다(句麗侯于佗入爲龍加)(이상은 揆園史話 檀君紀)

句麗와 구분하기 위해 高자를 붙였던 것이다. 高麗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麗’라는 소리니까, 中土의 소국이 高麗라고 부를 수는 없다. 高句麗를 高麗라 부른 것은 百濟다. 더 심하면 여적(麗賊)이라 불렀던 것이다.

국명이 비슷해서 中奴가 착각해? 중국에는 아예 똑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 천지다. 燕만해도, 北燕, 後燕, 前燕, 南燕에 西燕이 있고, 여기에 원연(原燕)이 붙는다. 原燕은 春秋戰國 時代의 燕이다. 燕뿐이 아니다. 누군가 이름 짓는 노력을 무척 아끼느라 魏, 齊, 周, 晉 등 모두 방위와 前, 後를 붙였다. 後漢도 셋이나 된다.

王莽의 新나라 이후에 세운 後漢 말고도 304~ 329 년까지 존속한 後漢과 947~ 950 년까지 존속한 後漢도 있다. 中奴도 창피한지 劉邦의 漢나라를 前漢, 後漢에서 이제는 西漢, 東漢이라 고쳐 부른다. 그래도 역사책은 前漢書, 後漢書다. 南漢, 北漢 까지 있다.

春秋戰國 時代는 나라가 백 개나 난립했던 터라 엄청 골치가 아팠던지 모조리 외자 국명을 붙였다. 하지만 정복민들이 中土의 나라, 그것도 春秋戰國 시대의 小國들의 이름을 따르길 원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春秋戰國 시대의 小國처럼 고작 中土 한 줌을 차지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극구 피해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北魏, 東魏, 西魏......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거란, 濊貊, 蒙古만 해도, 遼汗, 金汗, 蒙汗이라 했다. 단, 淸은 가짜 문명대국 中奴가 되고자 기를 쓴 나라다. 3 백년 사이에 金汗에서 淸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番韓 만을 朝鮮으로 알고 있다고?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 이라고 하였다(適韓國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新羅國은 본래 弁韓의 후예다(新羅國本弁韓之苗裔也 舊唐書)." 비록 番韓을 弁韓이라 썼지만, 그것은 제대로 부르기 싫어서 한 소리고 辰韓, 番韓, 馬韓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後漢書와 三國志에서는 “馬韓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人知田蠶作撓布).”고 했다. 新羅는 3 차 辰韓의 후예이다.

포정박(鮑廷博, 1728~1814)은 高麗圖經을 날조 하면서 이런 말은 남겨두었다.

북송(北宋)의 사신들이 고려에 입성하여 조서를 받을 때는 용호군(龍虎軍: 친위병) 수만 명이 갑옷을 입고 길 양쪽으로 행진한다.

北宋(?)의 사신을 영접한 것이 아니고, 宋나라 사신이 高麗에 왔을 때, 길 양옆으로 병사들이 끝없이 행군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미쳤다고 동아시아라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高麗가 손바닥만한 宋의 使臣을 수만 명을 동원해 사열케 할 것인가. 詔書를 받는 주체도 北宋의 사신이다. 사열도 아니고, 길 양쪽으로 행군한다고 했다.

설령 北宋(?) 사신이 조서를 받는 장소에 高麗 皇帝의 대규모 친위부대가 도열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高麗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고 미개 宋人을 위압하기 위해서지, 宋을 대우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鮑廷博은 宋나라 사신을 대우해 주느라 사열 이라도 해준 것으로 착각하고 남겨 놓았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高麗 수도에서 수만 명이 한꺼번에 행군을 하더라는 것이다. 한 번에 수만 명이나 행군할 정도면, 高麗 황제의 친위병이 수십 만 명은 족히 됐다는 것이다. 百濟와 高句麗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싸우느라 백만대군을 육성 했지만, 高麗에게는 대적하는 나라가 없었다. 그러나 高麗의 영토는 티벳고원 북부의 中土만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로 광대했다. 거대한 영토를 수비하는 병력이 없으면 小國조차 침범하기 마련이다. 또한 인구도 三國時代보다 훨씬 증가했을 테니까, 2 백만 이라고 해봐야 총인구 대비 1 % 에 해당한다. 결국 高麗는 백만 대군 내지 2 백만 대군을 실제로 보유했다.

後百濟 이후로 적다운 적이 없었던 高麗는 대군을 해산하지 않고 주변 속국들을 위압하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이를 테면 고작 거란을 침공 하면서 80 만 대군이나 동원하고, 수도방위군을 수십 만이나 두고 高麗 수도를 찾는 속국 사신이나 세계에서 몰려드는 상인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것 등이다. 高句麗나 百濟는 中土의 날만 새면 사라지고 등장하는 나라들과 中國倭를 가리켜 漢委奴國이라 부른 오만과 자만심의 나라지만, 高麗는 그런 면에 있어서 한술 더 뜬 나라였던 것이다.
 
高麗圖經에 있는 高麗의 영토에 대한 또 다른 기술을 보자.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 송나라 수도 개봉)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島)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790 리(1516 km)이다.

현 사학계는 廣州道가 “경기 광주의 덕풍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라고 한다. 그러면 전라남도 羅州에 新羅가 있었단 말인가. 百濟와 新羅가 도시국가란 말인가.

高麗圖經 역시 날조의 음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燕山道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라는 대목만 보아도 확실하다. “高麗史의 光宗 10 년조에 ‘鴨綠江 밖의 女眞을 白頭山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高麗史光宗十年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 揆園史話)." 遼西는 光宗 10 년(958) 이전부터 우리나라 땅이다. 光宗 10 년조, 압록강 밖의 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는 기록은 遼西에 살게 내버려둔 女眞族을 柴達木盆地로 옮기고, 遼西에는 高麗人들만 살게 했다는 뜻이다. 遼西도 高麗 영토라서 太祖 王建이 西京(현 重京)을 중시하라고 했다. 燕山道조차 高麗의 영토였던 것이다. 燕山島는 섬이 아니고, 행정구역명이다. 道를 음이 같은 島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百濟城에서 白帝城으로, 黃河를 潢水로 바꾸었듯이.

高麗의 수도 開京은 宋 수도 開封의 동북쪽에 있다고 했다. “燕山島로부터 육로로 가다가 遼水를 건넌다”고 했으므로 燕山道 이전에 수로(水路 강물)를 건넜다는 뜻이다.

라사(拉薩)에서 長安은 북동쪽에 있으면서 3790 리(1516 km)쯤 떨어져 있다. 開封이 怒江 이북에 있었다면, 開京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라사가 宋의 수도 開封 이었다(물론 唐의 長安이기도 했다). 開封에 있다가, 중토 서쪽에서 金汗이 영토를 확장하자, 宋은 수도까지 빼앗기고, 영토가 더욱 축소 되었다. 遼西는 高麗 영토니까, 宋은 티벳고원 북부 동쪽에 간신히 붙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宋은 티벳고원 북부 동쪽에 있었고, 더욱 축소되어 티벳고원 북부 대부분을 金汗이 차지했다. 北宋도 없었고, 南宋도 없었다.

高麗의 행정구역도 알 수 있는데, 新羅가 있던 揚子江 하류에 羅州道, 百濟가 있던 揚子江 중류 이남에 廣州道가 있었다.

1388 년(江陵帝 14) 5 월, 明의 전진기지로 변한 遼東征伐에 나섰다던 李成桂가 威化島에서 회군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현 鴨綠江 하류에 있는 섬이 위화도라고 우긴다. 그러나 위화도는 절대 섬이 아니다. 威化道를 威化島로 고친 것이다.

출정하는 군대가 뭐 하러 섬에 들어간단 말인가. 李成桂에게 대규모 육군을 섬으로 이동시킬 수단이 있었단 말인가. 헤엄쳐서 갔는가. 回軍을 결심 했으면, 진격로상에 그냥 주저 앉으면 된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威化道는 嘉陵江 근처에 있던 행정구역 이었던 것이다. 李成桂는 鴨綠江(嘉陵江)을 건너 泰川(富江)에서 회군했다. 威化道는 富江까지 포함하는 鴨綠江 이서의 행정구역이다.

江華道 역시 행정구역명이다. 도자만 道에서 島로 고쳐 韓半島의 섬이라 우긴 것이다. 韓半島의 섬 江華島는 도저히 39 년간이나 외부와 고립한 채 항쟁을 할 수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니다. 우선 수만의 장병이 주둔하자면, 그만한 주둔지가 있어야 하고 군량미(軍糧米)를 거둘 농경지가 있어야 한다. 군대가 사용할 무기와 훈련장...... 더구나 江華島에는 정부와 군대만이 아니라 開京 住民들까지 이주했다고 날조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高麗의 백성들이 江華島에 이중으로 세금을 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세금이란 쌀 등의 현물일 텐데, 江華島에 주둔한 수만의 장병을 먹이고 무기를 만들 금속을 배로 운반 하자면, 이 또한 장난이 아니다. 군수품도 수송할 수 있는데, 高麗를 정복하려는 蒙古軍이 과연 40 년간 진입하지 못할 것인가. 날조사에는 蒙古도 해전까지 수행했다.

차라대(車羅大)가 일찍이 수군 70 척에 깃발을 줄지어 세우고 압해도(押海島)를 치려고 윤춘(尹椿)과 한 관인을 시켜 배를 타고 독전케 했다. ...... “우리 배가 대포를 맞으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니, 당할 수 없다”하고, 다시 배를 옮겨 치게 했으나 압해인(押海人)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했기 때문에 몽고인들이 드디어 수공의 장비를 모두 파(破)하고 말았다(高麗史節要)

蒙古人은 안전한 곳에 있고, 高麗人 보고 독전케 했다는 것에 주목하자. 蒙古의 실상이다. 押海島는 섬이 아니다. 道를 島로 고치면 행정구역을 간단히 섬으로 날조할 수가 있다. “押海人들이 곳곳에 대포를 배치했다.”고 했다. 高麗의 군대가 아니라, 押海島의 주민이라는 것이다. 이 당시 高麗軍은 사병화되어 권력투쟁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蒙汗 으로서는 거저 얻은 高麗 땅에 東寧府, 雙城總管府 등을 설치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蒙汗干涉期에 江華島에는 開京에도 뒤지지 않은 만큼 번듯한 관료들의 저택이 즐비했다? 그러면서 韓半島의 江華島에는 東軒과 이방청(吏方廳)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지상건물은 사라져도 皇宮터, 관료들의 집터는 남아 있어야 한다. 하물며 皇龍寺도, 九層塔도, 안압지(雁鴨池)도, 佛國寺도 매몰된 땅에서 유적을 찾아 복원 했다면서 어째서 江華島만 텅 비어 있단 말인가.

高麗史節要에는 이 당시(高宗 44 년 9 월), 江華 등에서 수확한 농산물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강화의 공공전답에서 쌀 2,000 섬, 조 3,000 섬을 수확했다. 똑같이 최의(崔竩)의 집에서 수확했다(江華田二千結屬共粟三千結屬崔竩家 高麗史節要)

공공전답에서 5 천섬, 최의(崔竩) 집에서 5 천 섬 해서 합계 1 만 섬을 수확했다. 4,000 만평의 농지가 있어야만 1 만 섬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강화도와 팔만대장경 참조). 그 외 군소 농장도 다수 있었을 것이다.

섬에 황실 농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蒙古가 海戰에 약하다고 江華島로 천도 했다고 한다. 江華島가 섬이 아니므로 高麗는 천도하지 않았다. 高麗가 江華島로 천도 했다면 그 틈에 蒙汗이 開京과 黃河 이남을 차지해 버렸다. 武臣政權의 사병 三別草가 江華島로 이동한 기사를 遷都 했다고 날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