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이씨조선이 역사 말살시초였다

정우산기 2006. 12. 18. 11:41
김부식 영정과 삼국사기

우리나라 역사축소를 얘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三國史記 편자 金富軾(1075~1151)이다.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얘기할 때 반드시 거론하는 것이 日本이다. 그러나 金富軾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지 않았다.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의 최후의 抹殺者일 뿐, 유일한 말살자는 아니다.

歷史抹殺은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말살의 개념부터 정의하자. 歷史는 그대로 놔두고 이름만 抹殺이라 붙인 것은 말살이 아니다. 말살에 해당하는 역사축소 작업이 존재했기 때문에 역사말살이라 한다. 우리나라가 고작 滿州와 韓半島에 터 잡고 살았다면, 滿州에 웅거한 역사를 지우는 것은 歷史縮少는 될지언정 歷史抹殺은 되지 않는다. 동북아 전체가 우리나라 영토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중국 대륙까지 우리나라 영토 이어야만이 역사말살이 되는 것이다. 主人史를 奴隸史로 날조해야 말살 했다고 할 수 있다. 말살이란 滄海를 無로 만들거나 一粟으로 축소할 때만 붙일 수 있는 단어다.

잘난 조상은 광대한 영토와 빛나는 역사를 물려준다. 조상만 말살해서는 계승국까지 줄줄이 못난 나라로 만들 수가 없다. 倭奴가 아무리 미련해도 그렇지, 朝鮮의 존재를 지운다 해도, 朝鮮의 광대한 영토와 빛나는 역사를 계승한 三國과 高麗를 남겨놓고 韓國史를 말살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三國史記, 三國遺史만 대조해 봐도 엉터리 역사책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다면, 누가 그런 ‘歷史抹殺’을 애써 하려고 하겠는가. 倭奴가 韓國史를 말살하려면, 배달사부터 해서 朝鮮史, 三國史, 高麗史까지 다 말살해야 한다. 倭奴가 밥 먹고 할 짓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한 것이 아니다.

倭奴國. 순종해야 하는 노예 나라라는 뜻이다. 원래 中國倭에 붙여준 이름이나, 中國倭가 日本으로 집단 이주한 이래로 列島의 倭 또한 中國倭의 문화에 침몰되어 갔다.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李成桂의 나라는 日本을 倭奴國이라 불렀다.

倭奴에게는 韓國史를 말살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百濟, 新羅의 식민지이고, 大震國의 朝貢國, 高麗의 屬國이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에 까지 朝貢한 나라가 日本이다. 저 日本列島는 百濟, 新羅가 식민지를 건설한 땅이고, 高句麗는 百濟, 新羅의 上國 이었다. 日本은 高麗도 아니고, 高麗 諸侯國의 屬國이었다. 그리고 濊貊族의 나라에도 조공한 나라고, 濊貊族의 나라로 부터 가르침을 받은 나라다. 그러나 倭奴에 의한 말살은 韓國史 抹殺의 마지막이었다.

동기와 기회. 倭奴는 韓國史를 말살할 동기도 충분했고, 기회도 있었으나, 이미 그 전에 韓國史는 말살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말살할 수 있는 범위가 적었다. 三國遺史, 花郞世紀...... 倭奴는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책들을 뜯어고쳐 재보급 해왔다. 三國史記, 三國遺史는 壬辰倭亂 때 약탈해갔다. 日本은 李氏朝鮮을 강점했을 당시, 우리나라 역사책들 역시 日本書紀와 古事記 만큼이나 왜곡, 날조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럴 태세도 되어 있었지만, 이미 韓國史는 말살되어 있었다.

이미 李成桂가 朱元璋에게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준 지 5 백 년이나 지났는데,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책이 많다고 했다. 朝鮮半島史 편찬 요지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조선인은 다른 식민지에 있어서의 야만적이고 반개화된 민족과 달라서 독서속문에 있어서 문명인에 떨어지는 바가 없다. 고래로 사서의 존재하는 바 많고,

倭奴가 그림책 에토키(繪解)를 들여다보고 퇴폐소설 우키요조우시(浮世草子)를 읽는 것은 독서문화라 그러겠지? 우키요조우시는 朝鮮通信使가 건너가 학문을 가르쳐주자, 최후의 문맹자 집단인 사무라이의 눈까지 번쩍 뜨게 만든, 倭奴 땅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퇴폐소설이다. 우키요조우시와 기생들의 음탕한 연회에서 출발한 가부키(歌舞伎) 등 잡다한 것을 한데 묶어 겐로쿠 문화(元祿文化)라고 한다. 한 마디로 퇴폐문화다. 壬辰倭亂으로 李氏朝鮮의 國富를 모조리 강탈해 가서 그것으로 퇴폐문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倭奴는 한국 역사책을 焚書(1910 년 11 월 부터 전국의 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 년 12 월 말 까지 1 년 2 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檀君朝鮮' 관계 고사서 등 51 종 20 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웠다『제헌국회사,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 년사』)하고 일본으로 빼돌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倭奴王이 소유하고 있다는 족보책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은 중국의 문물을 전수 했다고 날조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졌다. 중국계 가문 109 개는 모두 중국에 있던 百濟, 新羅系의 가문이다. 高句麗系 역시 百濟系, 新羅系 가문이다[날조 日本史에서 新羅의 문물 전수는 상당히 축소되어 있다. 中國倭에게도 新羅는 원수같은 나라였다. 추잡의 절정 기모노(きもの)섹스, 혼욕(混浴), 요바이(よばい) 풍습 때문에 新羅 땅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하기야 家門이라는 말이 日本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中國倭가 저 땅에, 기모노섹스, 混浴, 요바이의 性文化를 전파한 이래로 천 년 동안 가문 해체를 경험한 나라다. 그저 다른 나라 보기에 창피해서 家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히로히토(裕仁)는 다이쇼(大正)의 섭정으로 있으면서 南淵書라는 희대의 僞書도 창작해내고, 倭奴王이 된 후에는 花郞世紀 날조에도 관여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新撰姓氏錄 역시 히로히토가 날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南淵書는 벌거벗고 흙구덩이에서 뒹굴던, 百濟의 군사식민지로 출발한 日本이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가 핵심 내용이다. 5 세기에도 日本은 원시 그대로의 아담과 이브였다.

日本의 순수창작이 아니다.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한 것은 배달, 朝鮮, 高句麗였다. 배달과 朝鮮, 高句麗를 日本으로 바꿔치기 했을 뿐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결단코 배달도, 朝鮮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데, 日本은 배달과 朝鮮이 동아시아를 지배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 王朝의 모든 正史書와 온갖 역사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의 역대 濊貊族 왕들이 숨겨놓았던 한단 역사서 51 종 마저 日本으로 빼돌렸다.

倭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나라 역사서를 분서하고 개서해서 韓國史 말살에 광분 했다는 것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韓國史 抹殺은 倭奴의 最大 國策事業이었다.

 

왜(倭)의 역사왜곡은 18 세기 부터다. 1607 년 부터 1811 년 까지 204 년간 파견된 朝鮮通信使에게 배우면서 역사왜곡에 열을 올린 것이다. 이 당시까지 倭奴는 그림책 에토키(繪解)나 들여다보는 문맹자들 이었지만, 학문을 깨우치자, 자신들의 초라한 위치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광적으로 역사왜곡을 해댔다. 참고서는 중국의 날조 역사책이었다. 우리나라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가공의 중국 문명을 받아 들였다고 날조 하기로 한 것이다.

왜(倭) 이전에 明, 淸과 李氏朝鮮 등이 韓國史를 말살했다 해서 왜(倭)의 韓國史 抹殺行爲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倭奴의 韓國史 말살은 李氏朝鮮의 역대 왕들이 숨겨온 한단 역사서와 1 차 사료에 집중되어 있다.


▲ 조선전도



李氏朝鮮의 천문관측 기록은 일식 214 회를 비롯하여 수만 개에 이른다고 추정된다(인간과 우주, 1997). 李氏朝鮮 末 까지 보존되어 있던 관상감(觀象監)의 방대한 천문관측 일기까지 훔쳐간 倭奴다. 우리나라 천문기록까지 말살한 倭奴가, 奴隸史를 지우고자 혈안이 된 倭奴가 주인나라의 역사는 말살하지 않았단 말인가.

日本 쇼소인(正倉院)에서 新羅의 民政文書가 발견 되었다면, 기뻐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곳에 있었는지 부터 의심 해봐야 하지 않는가.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역사말살의 전력이 없는 나라라고 해도 일단 그것부터 규명해야 한다. 역사말살 행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역사 말살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新羅가 자신의 民政文書까지 식민지 日本에 하사 했던가. 도저히 발견될 수 없는 장소에서 발견 되었으면, 어째서, 어떤 목적으로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다. 물론 韓國史를 왜곡하고 날조하기 위해서다. 倭奴는 倭史와 韓國史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날조한 식민종족이다.

“州, 縣, 管, 驛들이 없고 곳곳에 촌리(마을)들이 있는데 다 靺鞨人들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靺鞨人이 많고 土人(高句麗人)은 적다. 다 土人들로써 村長을 삼는데 큰 촌의 촌장은 都督이라고 하고 다음 가는 촌의 촌장은 刺使라고 하며, 그 이하는 다 백성들이 首領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에는 마땅하지 않다(無州縣管驛處處有村里皆靺鞨部落其百姓者靺鞨多土人少皆以土人爲村長大村日都督次日刺使其下百姓皆日首領土地極寒不宜 類聚國史)”고 柴達木盆地에 거주하는 大震國의 속민 靺鞨族을 설명한 것을 두고 大震國이라 날조한 日本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新羅의 民政文書에 나오는 인구와 재산 역시 최소한 두 자리는 축소했다. 논농사도 할 수 없는 靺鞨人의 나라에 조공을 하고, 新羅 선박을 타고 중국 대륙을 왕래하며 遣震史(遣眞使)를 보내던, 高麗의 제후국에게 조공하며 황제라 아첨하던 日本은 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김정호(金正浩 ?~1864)는 1864 년 까지 살았다. 金正浩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들 당시 朝鮮의 영토는 東鴨綠江에서 黑龍江 까지였다. 그렇다면 金正浩가 부분도를 만들었던가? 倭奴가 韓半島 이북을 떼어 버리고 다시 만든 날조지도다.

大東輿地圖는 倭奴에게 있어서 植民母國의 역사를 말살할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金正浩의 사망에서 30 여년만 더하면 倭奴가 우리나라에서 날뛰기 시작한 시절이다. 大東輿地圖를 倭奴가 20 세기에 다시 제작한다 해도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다.

大東輿地圖 木刻版이 舊總督府 건물에서 나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倭奴가 우리나라 영토를 보호 하려고 韓半島만 표시된 지도 원판을 숨기지는 않았다. 淸과 협정도 맺어 우리나라 영토를 넘겨준 종놈이 아닌가. 나중에 발견될 것을 감안해서 後代에 까지 길이길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半島史로 왜곡, 날조할 목적하에 넣어둔 것이다. 金正浩의 또 다른 지도 靑邱圖에는 義州가 현 大凌河 유역에 있었다. 현 大凌河가 西鴨綠江 이였다는 의미다. 大凌河 유역에 세운 淸碑를 白頭山定界碑라 유포시킨 倭奴다. 漢委奴가 漢委奴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인가.

倭奴가 우리나라 역사를 半島史로 축소 하려면, 우리나라 영토 축소가 선행 되어야만 한다. 땅마저 中奴에게 넘긴 상황에서 이를 마무리 하는 것이 지도축소이다. 그것은 中奴가 날조지도를 통해 우리나라 영토를 가로채고, 李氏朝鮮이 존속 내내 해온 짓거리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역사를 半島史로 축소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지도의 축소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倭奴가 우리나라에 1900 년 부터 들어와 우리나라 지리를 연구 한다면서 설치고 다녔다는 사실이 朝鮮總督府 산하 조선교육회에서 발간한 문교의 조선 1931 년 3 월호에 이토 후미마루(伊藤文治)의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박사의 조선산맥론을 소개한다』에 나와 있다.

1900 년에 벌써 『조선산악론(An Orogrphic Sketch of Korea)』이라고 써서 전세계에다 소개한 것이다. 고토 분지로는 우리나라 지리와 관련해서 모두 3 편의 논문과 지명사전(공동), 그리고 지도 1 편을 남겼다. 3 편의 논문은 모두 영문으로 발표 되었다. 고토 분지로의 조선전도는 1903 년 동경에서 발행 되었다. 컬러판이고 지명은 영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근대적 개념의 지리부도가 들어온 것은 倭奴가 李氏朝鮮을 강점하고 나서였다. “값싸고 질좋은 지도책이 대량 유통 되면서 재래식 전통지도가 자취를 감추게”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알면서 날조 이전의 지도를 연구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고, 오늘날 까지도 倭奴가 만든 韓半島 지도에만 죽어라 매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倭奴가 만든 半島史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현 사학계의 ‘독창적인’ 半島史라는 것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중국 고지도도 연구하지 않는다. 현 遼水가 시종일관 遼水였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태반 이니까.

大陸史를 논할라치면, 현 사학계는 民族史學으로 매도하기 일쑤지만, 그것 조차도 자신의 견해가 아니다. 倭奴가 먼저 써먹은 소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철저히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연구는 민족사학(民族史學)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가. 祖上의 장, 단점을 배워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고쳐서 국가의 밝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배우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조사를 實史라 믿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日本은 植民地史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한 것을 잘 알고 있다. 日本史가 하도 미개 하니까, 자기네끼리도 시침 뚝 떼고 이런다. “韓半島에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는 건 ‘한여름 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다.” “왜 없다고 단정하느냐. 한국학계를 고무시켜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런다. “우리도 다 안다. 우리가 朝鮮의 역사를 왜곡 조작 하였다는 것을. 日本이 이렇게 빨리 文明化된 것은 다 역사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알렸다가는 자부심이 없어지고 기가 죽어 안되니까 거꾸로 해서 용기를 내게 했다. 기를 살려서 淸日, 러일전쟁도 이겼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韓國史와 中國史를 바꾸기로 거래했을 때도 日本史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만큼 미개국이었기 때문이다. 李氏朝鮮通信使의 가르침을 받은 18 세기에 들어와서야 미개 日本史를 날조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한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의 식민지로 자진해서 바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 말살된 韓國史를 말살한다고 광분했던 것이다.

倭奴의 韓國史 말살 이전에 벌써 안정복(安鼎福 ; 1712~1791)이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三國史記를 무가치한 사서라 했다. 東史綱目은 箕子朝鮮을 정통으로 삼은 책인데, 그런 安鼎福의 눈에도 三國史記는 너무도 事大主義에 치우친 책이라 판단 되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는 安鼎福이 東史綱目을 쓴 李氏朝鮮 이순(李焞 : 李氏朝鮮의 肅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이전에 말살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나라 ‘역사축소’ 문제 가운데 가장 문제된다고 너나없이 지적하는 것이 三國史記 ‘왜곡’이다. 그리고 왜곡의 당사자로 倭奴도, 中奴도 아니고, 三國史記의 편자를 지목한다. 그러나 金富軾은 三國史記를 왜곡하지 않았다. 흔히 말하듯 金富軾이 事大主義者라서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 기술했다면, ‘중국이 있는데, 무슨 천문관측이냐?’하면서 천문관측 기록까지 다 빼버렸을 것이다.

현재의 半島史가 金富軾이 대륙의 지명을 전부 韓半島 주변에 우겨넣은 후에 생겨난 거라고 하기에는, 金富軾 사후의 高麗史와 李氏朝鮮史도 너무나 잘못 알려져 있다. 강조 하지만, 東寧府가 柴達木盆地이고, 雙城摠管府가 黃河 하류 이북이라는 사실은 高麗 末까지 내내 우리나라 영토가 동아시아라는 증거이다. 中國은 高麗의 속국이었다. 高麗의 도읍 開京은 高句麗의 마지막 도읍 平壤이다. 高麗 때까지 우리나라는 줄곧 중국 대륙에 위치했기 때문에 중국이 지명을 밀어 내거나 바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중국 역사책이 ‘唐은 대제국이다’라고 써놓았다고 해서 과연 金富軾이 믿었겠는가.

金富軾이 생존할 당시, 宋人의 삶이란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遊女도 많고,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형편이었다. 金富軾이 ‘그래, 지금은 쪼그라져도 그 옛날에 중국은 대국이 틀림없었어’하고 이해 했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학자들 보다 훨씬 이해력이 높았던 셈이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李氏朝鮮은 小國이라 高麗도, 大震國도, 三國도 小國 이라고 단정 하니까. 朝鮮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확신하니까. 이씨조선 이라고 말하면 왜노의 후예쯤으로 보는 낯뜨거운 비난은 어찌할꺼나,,,

高麗는 新羅가 물려준 광대한 영토를 감사히 받으면 됐다. 오히려 高麗는 高句麗를 계승했다고 천명했다. 단순히 三國 중 高句麗가 가장 큰 나라라서 高句麗를 계승했다고 한 것이 아니라, 高句麗(朱蒙聖帝 당시)가 동아시아의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지배자를 계승했다고 천명까지 했으니까, 高麗도 동아시아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고구려가 이상으로 가졌던 다물정신(多勿精神 : 復舊土)은 그대로 고려의 통치이념 이기도 했다.

근본적인 의문. 과연 皇帝國 高麗가 자국의 역사를 그것도 正史(高麗實錄)를 편찬 하면서 皇帝 칭호와 年號를 다 삭제 했겠는가. 국가의 위신을 드높이려고 建元稱帝했는데, 역사책을 편찬 하면서 축소, 누락 시켰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高麗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축소 되었던 것이다.

金富軾은 三國의 이해관계에서 초월한 후대 사람이다. 金富軾이 事大主義者라고 하는데, 高麗 末까지 우리나라가 동아시아를 지배했다. 金富軾이 事大했다면, 高麗에 한 것이다. 조국에 事大한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나. 愛國者다. 金富軾은 역사축소를 하지 않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려는 史家의 자세도 잃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나라 역사축소는 金富軾이 三國史記를 편찬한 이후에 일어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의심되는 것이 몽고간섭기(蒙古干涉期)다. 蒙古는 朝鮮의 계승국을 자처했고,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를 탐낼 수 있다. 三國을 제후국으로 밀어내고, 朝鮮의 계승국으로서 동아시아의 天子國 행세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지나지 않았다. 高麗는 蒙古干涉期에도 長安에 도읍했던 대제국이다. 그런 高麗가 蒙古가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 하도록 놔두겠는가. 蒙古에게는 동기는 있어도 기회가 없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은 三國史記가 왜곡 되었다고 주장 하지만, 三國史記보다 더 심하게 날조된 것이 바로 高麗史다. 무엇보다 韓國史 전체를 말살할 수 있는 것은 李氏朝鮮 뿐이다. 高麗가 高麗史를 말살하겠는가, 李氏朝鮮史를 말살할 수 있는가. 李氏朝鮮은 李氏朝鮮史도 날조 했지만, 李氏朝鮮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


李氏朝鮮이 韓國史를 말살했다는 증거는 많다. 그 중 하나가 한단사(桓檀史) 말살 기록이다.

世祖 3 년 丁丑 5 월에 팔도관찰사들에게 유시 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 백여 권과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璱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등 문서(地華錄等文書),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찰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世祖三年丁丑五月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券.動天錄.磨璱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等文書.道詵漢都讖記等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其廣諭公私及寺社)

예종 1 년 9 월 18 일(戊戌),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王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 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제서(地華錄諸書), 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 월 그믐날 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 월 그믐날 까지, 먼 도(道)는 12 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 품계를 높여 주되, 상 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 50 필을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睿宗己丑九月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王居仁薛業等三人記一百餘券.壺中錄.地華錄諸書.明鏡數及天文地理陰陽諸書 家藏者 京中 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 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 超二階 不納者 許人陳告 告者 依上項論賞 匿者 處斬 其速諭中外)

성종 원년 12 월 9 일(戊午),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천사(表訓天詞), 삼성밀기(三聖密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 하소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 지화록제서(地華錄諸書), 명경수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 이상의 9 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成宗卽位己丑十二月戊午 下書諭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一百餘卷.壺中錄.地華錄諸書, 無遺搜覓 上送事 曾已下諭矣 其已收冊者 依前諭 上送 餘書 勿更收納 李氏朝鮮實錄)

책을 바치면 벼슬을 2 品階나 올려주고, 숨기면 그냥 사형도 아니고, 참형(斬刑)에 처한다. 대한민국은 나라를 위해 순직해야 2 계급 특진 시켜준다. 고작 책 하나 바친다고 벼슬을 2 품계나 올려준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다. 책을 숨기면 죽인다고 하니, 이건 倭奴들이 韓國史를 말살한 것보다 더 심한 것 아닌가. 李氏朝鮮은 천문관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以前 王朝의 天文觀測記錄은 없애고자 혈안 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地理다. 우리나라가 高麗 時代까지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地理冊에는 모두 중국 대륙이 그려져 있었다. 이 사실을 은폐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自國史는 국민들로 하여금 널리 읽히게 해야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숨겨두지 않는다. 그래서 朝鮮도, 高句麗도 大震國도 모두 自國史 배우기가 국민들의 가장 중요한 학과과정이었다.

自國(?) 역사책을 수거해서 비밀장소에 감춰두고 自國民이 읽지 못하도록 하는 나라는 李氏朝鮮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李氏朝鮮은 濊貊族의 나라니까 우리나라도 아니다. 自國史가 아니니까 韓國史를 말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太白逸史를 보면, 震域遺記, 檀君世紀, 神誌秘詞 등 世祖, 睿宗, 成宗 때 수거한 한단사(桓檀史) 등에 포함되지 않는 책들이 인용문헌으로 나오고 있다. 震域遺記, 檀君世紀가 수거목록에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목록만 봐도 朝鮮時代에 관해서 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李陌은 수거한 비밀서적과 “집에 간직한 여러 상자들을 취하여 조사해 본즉 사전(史傳)으로 가치가 있는 것과 또 평소에 여러 고로(古老)들에게 들은 것들을 합쳐서 채록(取閱家藏陳匧其有可據於史傳者與夫平日聞諸古老者幷擧採錄 太白逸史 跋)”했다고 했지만, 李陌의 집에서 간직한 문헌 역시 수거목록에 포함된 문헌인데, 제출하기 전에 채록했던 것이다. 한단 역사책을 수거한 李氏朝鮮의 왕들은 世祖, 睿宗, 成宗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李氏朝鮮實錄도 내내 뜯어 고쳤으니까 요행히 눈에 띠지 않아서 삭제를 면한 것이 저 求書의 諭示로 둔갑한 것들이다. 실상 李成桂 부터 한단사를 수거 해야만 했다. 한단사 마저도 朱元璋에게 주었으니까.

古朝鮮秘詞. 李氏朝鮮이 세워진 후에 쓴 책이라 朝鮮을 古朝鮮이라 한 것이다. 한단 역사책을 수거하자, 한단사를 보충하기 위해 쓴 책이다. 世祖 이전에 이미 한단사를 수거 했음을 암시한다. “책을 바치면 벼슬을 2 품계나 올려주고, 숨기면 斬刑에 처한다.”고 한 것은 이미 수거를 했지만, 수거가 제대로 안돼 극단의 처방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려준다. 李成桂와 濊貊族들이 한단사 말살에 얼마나 혈안 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李氏朝鮮이 한단 역사서를 다 수거하고 감춘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李氏朝鮮은 분명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긴 나라다. 한단사만 수거하고 없앤 것이 아니라, 三國史記, 高麗史에서 온갖 문헌을 다 조작했다. 高麗가 高麗史를 축소할 수는 없다. 高麗는 李氏朝鮮史를 왜곡할 수 없다. 李氏朝鮮史는 李氏朝鮮 스스로에 의해 날조된 것이다.

李氏朝鮮實錄도 광범위하게 날조된 책이다. 단계적으로 우리나라 영토를 축소한 것 외에도 李氏朝鮮 이후의 동아시아사를 다 바꿨다. 일례로 明, 淸은 동시대에 존속하고 淸에게도 李氏朝鮮 초 부터 조공을 했으면서 淸이 明을 멸망시키고 동북아를 가로채자, 李氏朝鮮實錄을 뜯어고쳤다.

明, 淸과 李氏朝鮮은 중국 대륙을 揚子江, 黃河로 삼등분했다. 정복에 의해 차지한 것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어색한 분할이다. 三國도 7 백 년을 넘나들며 싸워온 揚子江과 黃河는 전투의 장애물이 아니다. 임의로 나눠 가지지 않고서는 그런 분할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淸은 스스로 明의 땅에 빌붙어 살던 미개종족임을 자인했다. 원래 미개종족이니까, 손해보는 것도 없었다. 역사날조를 할 당시에는 淸이 천년만년 중국 대륙과 동북아를 차지 하리라고, 머지않아 韓半島까지 집어삼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 정도의 사실 인정은 감수했던 것이다. 더구나 黑水女眞을 끌어들여 滿州族으로 만들고, 자신들은 漢族으로 멋지게 변신할 생각 이었으니까.

李氏朝鮮은 이미 기록에 나타난 것만 따져도 世祖 때 부터 한단 역사책을 수거해서 韓國史 말살에 적극 나선 나라다. 한단사도 말살한 李氏朝鮮이 三國史記와 高麗史를 그냥 둘 리 없다. 高麗史는 1392 년 부터 1451 년 까지만도 여섯 번이나 날조했다.

우리나라의 역대왕조 가운데 광대한 영토를 상실한 것은 李氏朝鮮 뿐이다. 그것은 雙城摠管府와 東寧府의 위치에서도 알 수 있다. 李氏朝鮮이 건국 하면서 우리나라 영토가 축소 되었으므로 李成桂는 高麗史를 왜곡해 자신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전가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해 버렸다. 영토 상실은 全王朝史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역사를 줄줄이 축소를 너머 말살한 이유는 될 수 없다. 李氏朝鮮의 비정상적인 행적은 단순히 우리나라 영토를 상실 했다는 사실 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영토 상실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5300 년의 식민종족 중국에게 李氏朝鮮이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明, 淸의 무력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 역사를 줄줄이 축소 했다면, 李氏朝鮮實錄에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李氏朝鮮은 高麗에게도 모든 책임을 전가한 나라다. 그런 나라이니 만큼 역사축소 책임을 中國에게 혹은 高麗에게 전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려 했다는 사실마저 감춘 나라다. 李氏朝鮮 에게는 떳떳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軍事大國은 李氏朝鮮이지, 明이 아니었다. 高麗가 발명한 모든 첨단무기는 明이 아니라 李氏朝鮮이 가졌다. 火藥, 火箭, 火口, 질려포(疾藜砲), 飛火槍...... 宋의 발명품으로 종이 위에서나마 인심 쓴 것들은 高麗 初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는다 (飛火槍이 走火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니까, 火箭, 火口, 疾藜砲도 中奴가 모방해서 만든 것일 가능성도 있다). 神機箭, 火車...... 高麗의 최첨단 무기들은 李氏朝鮮이 다 가로챘다. 高麗는 한민족 5 천 년의 과학문화가 응집된 진정한 軍事大國이었다. 李成桂는 明, 淸의 무력 위협이 아니라, 협박에 굴복했던 것이다.

李氏朝鮮이 존속하는 내내 明, 淸에 적극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李成桂한테 우리나라의 統治者로서 결격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점을 잡은 明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를 바꾸고, 영토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어떤 경우에 한 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없는가. 統治者 로서의 요건은 의외로 제한이 없다. 거지에 일자무식한 朱元璋도 중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오직 하나 우리민족이 아닐 경우에만 우리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없다. 淸이 中奴의 통치자가 되었듯이, 匈奴, 鮮卑, 거란(契丹), 濊貊, 蒙古 등이 줄줄이 中土로 가서 中土를 지배했듯이, 李成桂가 우리나라를 정복 했다면 충분히 우리나라의 統治者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李成桂는 濊貊族이고, 우리나라를 정복하지도 못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차지한 植民種族이 우리나라의 統治者가 될 수 있는 길은 華夏族과 제 동족에게 우리나라 영토를 넘기고, 우리나라 역사를 팔아먹는 것 뿐이었다. 그래놓고 온갖 인간들에게 역사말살의 책임을 덮어 씌웠다.

秦始王은 우리나라 역사를 축소하지 않았다. 中土 절반(티벳고원 북부 동쪽)을 통일한 秦始王 呂政은 解慕漱의 신임을 받고자 하면서도 檀帝를 직접 찾아 뵙지도 못하고 고작 中土에 있는 太山에 가서 祭를 올리려다 滄海力士 黎洪星의 공격을 받고 도망친 자다. 그런 자가 中寇의 역사가 한민족의 지배 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했을까. 죽는 순간 까지도 解慕漱의 신임이나 바랐을 자다.

唐 太王 李世民도 우리나라 역사를 훔칠 수 없었다. 唐 高王 李治도 高句麗, 百濟 역사서를 분서할 수 없었다. 너무도 미개국이니까, 우리나라 역사를 훔쳐 自國史를 거창하게 꾸미겠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흔히 거란(契丹)이 大震國史를 말살 했다고 말한다. 거란이 불태웠다는 大震國의 忽汗城 부터 거란은 王城으로 사용했다. 유목민족 거란이 동아시아 天子國의 皇城을 불태우면, 천막에서 사는 길밖에 없다. 거란이 분서 했다는 大震國史는 세세한 부분까지 모조리 中國史로 둔갑해 있다. 大震國 유민이 세운 나라들이 거란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忽汗城에 보관 중인 大震國 역사서는 분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全國에 보관 중이던 大震國史는 고스란히 남아 高麗가 물려 받았다. 원래 역사책은 전국민이 읽고 배우는 책이다. 史庫가 불탄다고 국민들이 가진 역사책이 사라지는가.

수천 년사를 순수창작 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中國史는 未開史에서 文明史로 둔갑만 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역사와 완전히 뒤바꿔 썼다. 李氏朝鮮의 협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고려 때 송의 관리가 대동강 평양에 와서 기자묘(箕子墓) 찾아 보기를 원하였으나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 년(1102) 예부상서(禮部尙書) 정문(鄭文 ?~1106)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기자묘라 하고 사당을 세워 중사(中祀)로 제향을 올렸다. 그 뒤 평양의 사당에서 주벽(主壁) 단군왕검의 위패를 서향지좌로 하고 기자의 위패를 주벽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기자는 삭망향축(朔望香祝)까지 올리는 제전(祭田)이 있었지만 봄·가을 두 번 지내는 단군 제사에는 제전조차 없었다.
http://greatautumn.com.ne.kr/history/root_of_history.htm, 9 천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高麗는 동아시아를 지배한 대제국이었다. 三國史記의 편자 金富軾 조차 箕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箕子朝鮮이 高麗 때 전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舞主古塚을 하나 찾아 箕子墓라 해? 李氏朝鮮은 사기그릇 몇 개 묻어두고 箕子墓라 한 나라다. 무엇보다 箕子를 한민족의 정통으로 떠받든 것은 李氏朝鮮이다. 李氏朝鮮의 얘기를 각색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高句麗의 平壤은 高麗의 開京이다. 浿水가 남으로 흐르는 平壤은 長安이지, 韓半島의 平壤이 아니다. 平壤에 箕子墓를 세웠다면, 중국 대륙에 있어야지, 현 平壤에 있을 수 없다.

한단사 부터 三國史記, 高麗史 등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한 것은 李氏朝鮮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나라 영토를 포기한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자신의 책임을 모두 우리나라에 떠넘겼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말살하고,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 漢委奴 明과 淸을 떠받든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은 잘난 나라로 추앙받고, 동아시아의 대제국 高麗는 단지 蒙古의 침입에 굴복했다는 이유 하나로 없느니만 못한 못난 나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蒙古는 高麗를 침입한 적이 없다. 아니, 침입할 수 없었다. 고려가 너무나도 거대한 대제국이었기 때문에 유럽까지 정복한 蒙古도 高麗만은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高麗는 위대한 조상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한 나라이고, 李氏朝鮮은 위대한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려한 나라다. 하기야 제 조상이 아니니까. 배달에서 高麗 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언제나 강대했다.

倭寇가 高麗 末에 침입 했다고 하지만, 李氏朝鮮 초에도 백여 차례나 침입했다. 李氏朝鮮은 크고 작은 倭亂까지 수시로 발생한 나라다. 그뿐인가. 결국 5 천 년의 식민종족 華夏에게 중국 대륙과 동북아를 준 것도 모자라 上國으로 떠받들고 華夏의 일파인 倭奴 한테는 국권까지 빼앗긴 나라다. 그 결과, 우리민족이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하고 한단 역사서를 모조리 거둬들여 왕궁에 감춰 두었으니까, 사실상 倭奴가 王宮에 있는 한단 역사서만 일본으로 빼돌려도 우리나라 역사를 말살할 수 있었다. 李氏朝鮮이 그처럼 혈안이 되어 시시때때로 韓國史를 수거해왔기 때문에, 그게 전통으로 굳어져 倭奴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수색, 압수할 때도 순순히 내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