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스크랩] 중국은 조선이 대륙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정우산기 2008. 7. 11. 11:49
 

중국은 대륙조선을 스스로 인정했다.


현중국은 조선이 중원대륙에 있음을 사서를 통하여 스스로 인정했다. 20세기에 25사를 새로 작성하면서  명사가  추가되었고 청사도 새로 만들어졌는데, 새로 만든 명사, 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 명사 첫머리

한이라고 부르기 전에 이땅은 조선이었다.  그 후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뺏겼다가 한무제가 이를 정복하고 4군을 설치했다. 한말의 부여사람 고씨가 그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라 했다. 평양에 도읍했으니 낙랑의 땅이다.  그 뒤 당나라와 싸워 동쪽으로 밀려갔다. 고구려 후에 왕건이 일어나 신라와 백제땅을 차지하고 송악에 도읍하여 동경이라 부르고 평양을 서경이라 하였다. (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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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한은 전한을 뜻하며 현역사부도에는 전중원대륙을 통일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한은 대륙의 중서부를 차지했고 북부는 북부여, 동남부는 삼한(마한,진한,변한)이 위치하여 열국시대를 열고 있던 때였다. 그 전한이 있기 전에 중원대륙땅이 조선, 즉 고조선, 대륙단군조선의 것이라고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

 

지금의 대한교과서 역사부도에 있는 한반도와 현만주에 걸쳐있는 고조선의 모습과는 전혀 내용이 다르다. 단군조선은 근세조선의 근본이고 근세조선의 선조국가이며 대대로 단군을 모시는 사당도 중원대륙에 여러군데 있었다.


  그리고 한무제는 위만 조선을 정복하고 4군을 설치했다는 이야기는 한4군이 한반도가 아니고 중원에 설치했다는 것, 즉 한나라 본토안에 4군을 두어 통치했다는 것이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그 한나라 땅을 고씨, 고주몽이 차지하여 그 땅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나와있다. 한나라의 수도 장안은 고구려가 정복하여 그곳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세웠고 그 동쪽의 산이름을 고구려산이란 뜻의 려산(여산)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평양은 원래의 한의 낙랑지역(한의 경기, 중국지역)이라 했다.   그리고 당나라(신라?)에 밀려 동쪽으로 갔다는 것은 신라에게 멸망당하고, 후에 동쪽 하북성쪽에 발해를 세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먼훈날 대륙고려의 왕건이 대륙후삼국을 평정하고 진정한 통일국가를 이룬다. 수도는 대륙신라의 수도 낙양근처 송악에 황도인 개경을 세운 것이다.  추측으로 애매모호한 단군조선사를 현중국의 역사책 명사는 분명한 중원대륙사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2. 청사 첫머리

청나라?는 장백산에서 일어나 몽골을 굴복시켜 변방으로 삼았다. 중원을 치려고 하였으나 중원에서는 조선이 명나라?와 “팔꿈치와 겨드랑사이”로 있어서 청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다. (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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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에 볼때 청은 결코 중원을 정복할 수 가 없었다. 강대한 두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조선과 명?이 그것이었다. 중원을 치려고 했으나 그곳의 주인은 조선이었고  황제국인 조선을 제후국인 청?이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반도에 조선으로 표기된 한국사와는 전혀 내용이 어긋난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조선을 반도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 현중국은 25사에 있는 명사를 통해서 단군조선을, 대만은 청사를 통해서 근세조선을 각각  중원대륙에 있는 국가로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25사

지금으로부터 7백 여년 전, 문천상은 이미 어디서부터 역사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지 난감해했다.  문천상이 살았을 당시 중국의 정사(正史)는 17사 이것만 해도 적잖은 양이지만, 여하튼 열 일곱 부의 역사에 불과했다. 그뒤 3백년이 흘렀을 때는 17사가 21사, 또 3백년이 흘렀을 때는 21사가 25사. 현재 우리가 보는 중국 정사는 25사인 것이다.
정사 25사에는 천자 치세(天子治世)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와 저명한 개인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불가결의 요소로 하여 기전체(紀傳體)에 따른 중국 역대의 역사. 그 밖에 연표(年表)·계보(系譜) 또는 제도를 기록한 지(志, 또는 書) 등을 포함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사기(史記)》에서 시작되는데,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이에 더하여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내어 24사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인행(印行)하였는데, 합하여 3,243권에 달한다. 민국 초에는 커사오민[柯?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주2)  청사는 후대에 대만에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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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인물로본 한반도 조선사의 허구 상 (김종윤 지음,여명)

(주2) 글쓴이: DAUM 신지식  건강정보나눔터님  2006-01-13 15:35

 

출처 : 파도의 근원지는 대한민국
글쓴이 : 파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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