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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골비사》,《집사》,《사국사》,《투르크의 계보》- 발해,고려,금,원,청

정우산기 2015. 8. 22. 11:57

 

운영자는 조선Pub에서 전원철 박사의 아랫글을 인용하면서도 평시에 북방기마민족사에 그 해답이 있음을 적시하였으나 그가 이 분야에서 20여년간 연구하며 탁월한 업적을 2권의 책으로 이루었음을 본다. 역시 동북아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답은 중앙아시아 고,중세 역사를  그들의 언어로 집필한 古書를 이해하고 해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부여사,고구려사,신라사,발해사가 이 범주와 관련있음을 알게된다.

운영자가 이미 부여편에서 기술한 <부여사> 관련 논문들이 조금이나마 그 이해에 보탬이 될것으로 생각한다. 러시아 학자들의 전언을 들으면 "중국은 고구려사를 한국에 양보할수 있어도 발해사 만큼은 포기할수 없다" 한다. 필시 발해사를 한국에 양보하는 순간 한나라,수-당 역사와 그들이 각축했던 동서 영토가 순식간에 한국역사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서 아쉬운 점은 고대삼국의 활동범위와 발해의 활동 무대를 한반도와 만주지역으로 국한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시 한국사에 대한 조선과 실학자들이 남긴 지리적 정의가 그 이유인 듯하다.   (운영자 주)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1) -전원철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 제국(諸國)-청나라가 한 가계

 

몽골비사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계보가 나오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칭기스 칸에서 3~4대를 제외하고는 허구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왔다. 또 학자들은 그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시대나 그들이 살던 장소, 그들이 행한 일들의 실체도 전혀 이해하거나 규명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 전 박사는 이 계보에 나오는 인물들 하나 하나가 실존인물이며, 그들이 살던 시기, 심지어 연도까지 규명해내고, 그들이 살던 곳이 막연히 몽골의 그 어디쯤이라는 식이 아니라, 우리 땅 어디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지명까지를 알려주고 그들이 살면서 이룬 일들을 입증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우리 역사의 여러 잃어버린 고리들을 보면, 그는 고구려는 우리, 말갈(발해)은 퉁구스족이라는 주류학설을 뒤엎고 발해를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인 대()씨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서자(庶子) 집안이며, 고구려와 발해는 한 가계에서 나온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또 발해가 망하는 시점 직전에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신라의 개성호족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발해 왕가의 외손임을 밝힌다.  

구체적으로 왕건은 금()나라 시조 함보(函普)의 아버지 금행(今幸)의 외증손이라고 밝힌다. 왕건은 거란이 발해를 무너뜨리자, 격노하면서 예물로 보내온 낙타들을 만부교 다리 아래에서 굶어 죽게 하면서, 거란과의 국교수립을 거부했다. 이 때 그는 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망명해 온 발해 세자 대광현 일행을 자신의 왕씨 종적(宗籍, 족보)에 올리는데, 그 이유는 한 집안 종씨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왕건이 몸소 보인 그 미스터리한 선언(발해는 내 친척의 나라)과 행동(발해 세자를 자신의 족보에 올린 것)이 이해가 될 수 있다. 926년 발해가 무너진 우리 북한 땅에서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명백히 보여주듯이 서기 948년 고려 정종 3(定宗 三年)때부터 이미 여진(女眞)이 들어섰는데, 이는 발해의 계승국이었음을 보여준다.

금 시조 함보는 이때에서 약 3세대 전에 장차 여진으로 불리게 될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갔는데, 발해가 망한 뒤 4세대 후에 함보의 4대손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웠다

이와 관련, 최근 수년간 몇몇 학자들이 신문, 방송 인터넷, 논문 등에서 주장하여 금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가계가 신라 왕족이라고 하는 견해가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전원철 박사는 책에서 이 견해는 철저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7대조 함보(函普)와 그 아버지 금행(今幸)은 남국 신라가 망할 때 936년대의 인물이 아니라, 북국 발해가 엄연히 존재할 때인 840~50년대의 발해 왕족들로 각각 대야발의 5대와 4대손이라고 밝힌다.  

또 그는 신라 왕가의 후손이라고 우리 학자들이 믿어온 청나라의 시조 아이신교로(愛新覺羅:애신각라) 누르하치 역시 고구려-발해-고려와 한 가문인 금나라 황족의 후손이라고 한다. 결국 고구려-발해=고려-금나라-원나라제국-청나라가 한 가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그들 왕조를 창조한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한낱 소수의 양치기 야만 유목인이 세계정복?

 

우리는 그동안 칭기스 칸에 대해 몽골 초원의 여러 유목민을 통일한 좀 더 힘 있는야만적 유목민 부족 출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천 년 간 초원에서 양이나 치던 민족이 갑자기 부족 통일을 이루고, 여러 문명 세계를 정복한 동기와 힘의 원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해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인 전원철 박사의 말대로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칭기스 칸과 그의 원정대는 더 이상 말을 탄 야만 유목인이 아니며, 그가 벌인 정복활동도 그저 영토 확장이나 재물 약탈, 혹은 그저 별다른 이유 없이힘을 과시하기 위해 벌인 게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원철 박사는 그 이전에는 세계지도에 없는 땅에서 느닷없이 전 세계를 떨게 한 세계 정복자가 탄생했다아무런 문화, 전통, 기술, 조직력의 배경이 없던 한 줌도 안 되는 소수의 한낱 양치기 유목민 무리 따위가 자기보다 인구면에서 1000배가 더 되고, 또 당시의 온 세상을 지배하던 여러 개의 문명세계를 그렇게 단시일 내에 정복하는 일을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결국 세계를 정복한 칭기스 칸의 몽골족은 뛰어난 무기 제조술과 오랫동안 집적된 문화와 정보전달체계,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겸비하여, 더불어 잘 정비된 사회조직을 가진 고구려-발해-후고구려의 유민들이었기 때문에, 또 여기에다가 그들이 유목민의 말 타는 기술을 잘 조합했기에 그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주장이다

칭기스 칸의 집안은 자기 조상이 패배한 전쟁의 기록을 후손이 절대 잊지 않도록 기록하였고, 마침내 승리의 기록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과거를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비록 발해와 후고구려가 망해 이 땅을 떠났지만 우리 피붙이로 났던 그들이 나중에 전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 그 역사의 발굴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똑바로 알고, 또 우리의 미래 비전이 제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습니다.”

 

29개 언어로 된 고대 사서를 전부 독파

  

그는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연구하고, 칭기스 칸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혼자 29개 언어로 된 사서들을 전부 독파했다고 했다.  

서양에서 옛날에 발간된 라틴어 기록들을 비롯하여, 중세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사서는 물론, 동방의 몽골비사등 중세 몽골문, 청대 만주어 본,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및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등 각 사서들의 내용을 교차 체크하여, 인명 및 지명을 각 시대별 언어의 변천과정을 통해 면밀히 분석하였다는 것이다.  

저는 몽골비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등 서방사서에 기록된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shejare, 족보)’를 동방 및 우리 사서들과 교차 체크하여 그 인물들의 이름 소리만 대충 맞추어 나가는 식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곳의 지명, 그들의 활동시기와 연도, 행적, 족보상의 계보까지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우리 사서에서 확인하여 칭기스 칸의 계보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사서들의 내용이 서로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이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십수개 민족어로 쓰인 중요 원본사서의 해독만 하더라도 전문역사가나 전공자조차도 엄두를 내기 어려울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이들 원서의 해독뿐 아니라 그 내용을 대조, 비교, 교차확인까지 해내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연구·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전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맞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 언어를 이해하는 여러 동서양 역사학자들 여럿이 모여 함께 해야 할 연구를 혼자 해낸 셈입니다. 그 결과 1162년 칭기스 칸 탄생 이래 853년간 숨겨진 비밀, 아니, 그 선조로부터 치면 고구려 멸망 후 1300년 동안 숨겨진 세계사적인 대비밀이 드러났다고 자부합니다.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한 학자는 제가 이룬 연구 성과를 보고 세계사 1000년 간을 다시 써야 할 대발견이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몽골'은 칭기스 칸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말 고을에서 온 말. 

 

“1990년 우리나라가 몽골과 국교를 맺었는데, 당시는 저는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을 갈까 취직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한국에 유학온 몽골학생을 알게 된 계기로 몽골어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하였고, 그를 통해 몽골어판 몽골비사를 구입해 읽게 되었습니다.  

몽골비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속에 의문이 생겼는데, 몽골비사<몽골사><칭기스 칸사>라고 하지 않고 비밀스러운이라는 수식어를 달았을까 하는 것 하나와, 칭기스 칸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보통 학자들이 부르테 치노를 몽골어로 잿빛 푸른 이리(蒼狼)’라고 푸는데, 몽골인들은 이 때문에 자신들이 푸른 이리의 자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고, 항상 부르테 치노는 과연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이 물음을 끈질기게 추적했고, 그 결과 몽골족의 선조라고 하는 부르테 치노는 그 동안 학계와 항간에 알려진 전설적 푸른 이리와는 전혀 다른 말로, 고구려-말갈어인 부여대씨랑’(夫餘大氏郞: 부려-테치-)이라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치노’(氏郞: 씨랑)라는 말은 오늘날 씨족의 종친회장 격으로 고구려-원나라-북원을 거쳐 몽골어로 지농이라는 말로 계승되었다는 것

“‘몽골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칭기스 칸이 자신의 종족만을 칭하는 명칭이었는데, 이후 그가 통일한 몽골고원의 종족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실 테무진 이전에는 테무진이 통일한 지역은 이름조차 없던 땅이며, 종족의 이름도 메르키드, 케레이트, 타타르, 나이만 족 등 여러 종족이 살고 있어서 하나로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몽골은 칭기스 칸은 선조의 나라인 말갈’(=물길), 말 고을의 옛 소리인 -고을’, (, )-고을(, )’에서 생긴 말입니다. 고구려는 여러 개의 고을(구려)일곱 개의 말 골(말갈)’로 이루어져 커진() 나라 커구려(고구려)’였고, 결국 말갈’, 곧 옛소리로 몰골이 몽골의 어원입니다.”  

전 박사는 칭기스칸은 몽골리아 땅의 여러 종족들을 통일한 뒤 자신의 나라 이름으로 고구려-말갈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선조가 바로 말갈(발해) 왕족이었고, 또 그가 나라를 세울 당시에 동쪽에서는 자신과 같은 선조에서 나와 혈통을 나누는 왕건의 고려(고구려)’가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라는 국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몰골(말갈)’의 전음인 몽골을 자기 국명으로 택했다는 것이다.  

 

칭기스 칸 계보에 등장하는 '투르크어 고어' 우리 옛말 (운영자가 부여사 논문에서 이미 밝혔다) 

 

-우선 <월간조선> 기고문을 읽어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정리를 한번 해주시죠. 어디에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까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한 기록은 우선 중세 몽골어로 쓴 몽골비사를 비롯하여, 집사》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칭기서의 서등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타타르어 된 서방사서와 셀렝게 부랴트종족의 역사등 부랴트어로 쓰인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사서의 원문을 모두 비교 대조하고, 텍스트의 행간을 해독하여 우리 삼국사기, 고려사·구당서등 동방사서를 교차 대조하여, 칭기스 칸 선조의 실체를 찾아낸 것입니다.”

 

-그런 책에 기록이 있다면, 왜 그 많은 서양의 칭기스 칸 연구가, 동양의 학자들이 그 동안 그런 사실을 밝혀내지 못한 것인지요

역사학자들이 당대의 언어를 모르면 모든 시대의 역사 연구가 그렇듯이, 위에 열거된 책을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에 관한 사서는 중세 페르시아, 투르크어, 몽골어, 타타르어, 한문 등 여러 가지 옛 언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여러 나라 언어를 우선 이해해야 그 사서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사서들이 특히 각 언어들의 중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어려움도 있죠.  

또 단지 언어를 이해한다고만 해서 이 사서들의 비밀을 알 수는 없습니다. 칭기스 칸의 선조의 계보는 동방과 서방이라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기록되었지만, 서로 매우 일관되게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 계보 속의 선조들이 살았던 정확한 지방과, 민족, 그 언어, 그 역사를 모르고서는 이 사서들의 비밀을 절대 캘 수가 없습니다.” 

전 박사는 예컨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로 된 사서는 그 언어를 쓰는 민족의 학자들이 읽으면, 외국어로 배워야 하는 우리보다는 비교적 쉽게 읽을 수는 있겠지만, 막상 그 언어를 쓰는 학자들도 그 사서의 진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 사서들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이 투르크어나 페르시아어 어휘들이 아니기 때문이죠. 당연히 그 뜻을 알 수가 없죠. 그들은 우리말과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학자들이 그 이름들을 그 무슨  ‘투르크어 고어라는 식으로 풀이했는데, 그들은 막상 그 투르크어 고어휘의 소리나 뜻이 무엇인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그 ‘투르크어 고어는 사실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죠. 몽골인들이 왜 하필 투르크어를 썼겠습니까? 또 서방 학자들은 칭기스 칸의 선조들이 오늘날의 몽골리아가 아니라 우리 땅에서 살았다는 점을 몰랐고, 우리 역사도 몰랐기에 그 역사적 진실을 캘 수가 없었던 겁니다.”

 

세계의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을 풀지 못한 이유

 

-우리나라 학자들이나, 박사님께서 지나국이라고 부르는 중국몽골 학자들은 왜 그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까.  

우리 역사학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 타타르어, 몽골어, 만주어, 부랴트어 및 티베트어 등 그런 외국어로 적힌 사서를 읽을 어학적 지식이 없습니다. 대개는 한문이나 이 연구에는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일어, 영어 정도만 이해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또 더러 이 언어들을 일부 이해하더라도 그 사서들에 적힌 내용이 우리 땅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 거죠다른 나라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칭기스 칸 관해서 수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박사님과 비슷한 주장이라도 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기존 대부분의 몽골 학자들은 서방 학자들이 완전히 오역하거나 잘못된 학설을 내놓은 것을 그 무슨 선구적 업적이라고 이야기 하며, 서방 학자들이 오류 위에 세운 지식체계에 대한 권위를 맹종하면서 안일하게 답습해온 이유도 큽니다. 쉽게 말해 독자적 연구와 고민 없이 그저 프랑스의 어느 학자가, 독일학자 누구누구가, 러시아의 어느 전문가 누구누구가, 몽골의 어느 교수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한다는 정도의 지식으로 칭기스 칸을 연구해 왔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요즘 학자들은 그렇다 쳐도 중국 본토 학자들의 연구는 어떤지요.  

이미 칭기스 칸 당시부터 송나라 사신 등이나 역사가들이 잘못 알고 기록한 사실이 많습니다. 칭기스칸은 지금부터 약 852년 전에 탄생했지만, 그의 선조 이야기는 고구려가 망한 668, 곧 지금부터 1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칭기스 칸과 그 선조들이 활동했던 지역의 지명과 인명, 직책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우리말인 말갈어(고구려-발해어)에 뿌리를 둡니다.  

그렇지만, 그 낱말들이 몽골어, 지나의 한어(漢語), 만주의 퉁구스어,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투르크어,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란에 이르는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반도의 아랍어, 그리고 유럽의 라틴어와 이태리 토스카나 방언 등으로 전해지면서 많은 변화를 거칩니다. 이 때문에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를 적은 그 사서들이 기록된 해당 시대의 언어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그 사서들 속의 비밀은 결코 풀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전원철 박사는 고대와 중세, 근세에 걸쳐 기록된 동서방의 어렵고도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사서를 하나씩 해독하면서, 거기에 기록된 선조들의 이름과 그 뜻, 그들이 산 시기와 한 행적 등을 동방사서와 대조하여 확인하면서 칭기스 칸의 뿌리를 찾아 들어갔다결국 칭기스 칸 선조가 기록된 책에 등장하는 인명과 언어, 지명이 모두 고대 우리말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을 연구했지만, 칭기스 칸의 뿌리인 우리 고대사와 우리 옛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연구를 해봐야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코드가 풀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지명과 인명, 관직이 현재 몽골이나 투르크어에서 비슷한 단어에 연결시켜 해석하거나, 예전의 학자들이 궁여지책으로 풀어놓은 뜻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2편에서 이어짐)

 

칭기스 칸의 선조, 영원히 이 땅을 떠나다

 

칭기스 칸 가계의 비밀 코드를 찾아서(2)

세계 정복자 칭기스 칸-중원의 지배자 금나라 황제-고려 왕건은 한집안

 

칸의 특명으로 집필한 칭기스 칸 선조의 역사  -앞서 말씀하신 집사사국사같은 사서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죠.   

집사는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의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입니다. 가잔 칸이 그에게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라고 엄명을 내린 겁니다.    

라시드 웃딘은 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당시 4칸국의 종주국이던 원()나라에서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와 역사에 관해 정통한 원로대신 볼라드 칭상(승상)과 여러 학자들, 그리고 황금의 책이라고 라시드가 부르는 책, 족보를 비롯하여 막대한 분량의 기록물을 수레에 싣고 오도록 하여 그들의 설명과 해석 아래 그 사서를 집필했습니다.”   

전 박사는 이 사서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모골(몽골) 종족의 기원 이야기로 칭기스 칸의 선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보다 조금 뒤에 쓰였으나, 라시드가 말한 그 황금의 책을 더욱 충실히 반영한 사국사는 칭기스 칸의 선조에 대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준다고 한다.   

 사국사에 대한 전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국사는 티무르 왕조의 4대 칸이자, 역시 칭기스 칸의 후손이었던 울룩벡(1394~1449)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집사속의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보다 훨씬 앞선 칭키스칸의 선조 계보로 집사가 생략한 부분까지 적고 있다.   

울룩벡은 제2의 칭기스 칸으로 전 유럽과 아랍지역을 덜덜 떨게 했던 아미르 티무르(1336~1405)가 세운 왕조의 칸인데, 그의 할아버지인 아무르 티무르 역시 부계의 모계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면서 부계가 칭기스 칸의 선조대에서 갈라져 나온 몽골 바를라스 가계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칭기스 칸 가계의 족보인 황금의 책자체는 오늘날에는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전 박사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그 자신도 이것을 꼼꼼히 참조하고 글을 썼고, 그 족보의 골자는 방금 말한 다른 사서들에도 대부분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중세 서방의 사서와 함께 몽골비사등 동방의 책을 비교 대조하며 이면에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만 칭기스 칸 선조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전 박사의 설명이다.  

 

집사에 기록된 타타르 종족(唐)과 모골 종족(말갈)의 대전쟁의 비밀    

 

-위 사서를 쓴 사람들은 세계를 정복한 자랑스러운 칭기스 칸의 조상을 이야기하는데 왜 굳이 그 이면의 숨겨진 비밀코드를 해석해야 알 수 있도록 기술해 놓았습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 사서들은 당연히 칭기스 칸 가문에 내려오는 족보를 본대로 들은 대로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하지만, 칭기스 칸 10대 혹은 20대 선조의 이야기이다 보니까 원래의 고대 말갈어(우리말)로 된 인명과 고대의 지명이 몽골어나 투르크어, 페르시아어 또는 한자어화되면서 원음과 많이 달라졌고, 또 그마저도 오늘날의 언어들이 아니라, 중세기 언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페르시아어와 몽골어 등 그 외국어 본문 속에 있는 인명 지명들은 본문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말갈어로 된 말입니다. 이 때문에 단번에 그 의미를 해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각 사서를 교차 대조하고, 칭기스 칸이나 그 이전 선조들이 살았던 당대의 언어 고증을 통해 이런 인명과 지명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이들 몇 가지 사서는 원래 황금의 책족보에 기반하여 그 선조들의 생전의 활동기록인 행장(行狀)을 곁들인 글들입니다. 황금의 책족보는 라시드 자신도 집사에서 말하듯이 황제의 재고에 비밀스럽게 간수되어, 황족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대아미르들이 항상 지키고 있던 책입니다. 곧 이 책은 비밀스러운 황족의 뿌리를 적은 책인데, 그 내용을 올바로 풀이하지 않으면 그것에 바탕을 둔 사서들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칭기스 칸 선조들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칭기스 칸이 고구려-발해 왕가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분화되었습니까.   

사국사에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보통 발해의 당나라 등주 공략으로 알려진 싸움이 시발이 된 발해와 당나라 간의 전쟁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이래 약 한 세대 29년 뒤인 698년에 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를 재건한 겁니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압제에서 벗어나, 나라를 재건 한 지 34년 만에 또다시 대전쟁이 터졌습니다. 당나라가 다시 일어선 고구려, 곧 발해를 보면서 과거의 고구려가 다시 나타난 악몽에 겁을 먹고 발해를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부립니다.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떼어 내려고 획책한 것이지요. 이 때문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개략적으로만 적은 것이 사국사가 말하는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 간의 대전쟁입니다.   

 

주)운영자가 구당서 <북적열전>을 인용했다.

구당서나 신당서는 동이인 고구려,신라,백제,왜와 달리 발해를 北狄으로 보았다. 왜일까?

당현종

二十年,武藝遣其將張文休率海賊攻登州刺史韋俊.詔遣門藝往幽州徵兵以討之,仍令太僕員外卿金思蘭往新羅發兵以攻其南境.屬山阻寒凍,雪深丈餘,兵士死者過半,竟無功而還.武藝懷怨不已,密遣使至東都,假刺客刺門藝於天津橋南,門藝格之,不死.詔河南府捕獲其賊,盡殺之.

20년 무예(무왕)장문휴를 보내 해군을 이끌고 등주자사 위준을 공격하였다.이에 문예를 유주로 가게 하여 토벌하게 하고 이내 태복원외경 김사란에게 시켜 신라가 병사를 일으켜 발해의 남쪽경계를 치게 하였다. 산에서 추위를 만나 얼어 죽은 병사가 반이 넘었고 성과 없이 돌아오게 되었다.무예가 자객을 은밀히 동도(낙양)로 보내 천진교 남쪽에서 문예를 해치려 하였으나 살았기에 현종이 하남부에 시켜 자객을 찾아 체포하도록 하여 죽였다.(이상)

 

여기서 모골은 곧 말갈’, 발해입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에는 승승장구하던 말갈, 곧 발해가 패하면서 칭기스 칸 선조들은 그들이 원래 살던 터전을 떠나 피신해야만 했고, 그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운영자 주- 구,신당서에 발해거 전멸했다는 내용은 없다,)  

전 박사는 이후 이야기를 집사의 기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네쿠즈.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마침 전쟁에서 주인을 잃는 말들을 잡아타고 야간의 어스름을 이용하여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쳤다.   

그 계곡은 오직 한 필의 말과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준한 곳으로 거기를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가 나타났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이다.    

오늘날에도 터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은 이곳을 자기네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와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동방아시아의 그 어느 곳이라고 막연히는 알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들 말하곤 한다. 터키에서는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의 전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르가나 콘으로 피신한 칭기스 칸의 시조들  

 

전 박사는 이 전쟁에 나오는 키안은 라시드가 모골어(몽골어)’산골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물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이름은 사실은 말갈인들이 한자말로 표현한 산골 물 간()’이고 니쿠즈는 말갈말로 님금이란 말이 모양을 바꾼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라시드가 말한 모골어라는 것은 사실은 우리말 방언인 말갈어였고, 니쿠즈는 발해 제 2대왕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로, ‘님금이라는 이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운영자주-도리행은 당나라에서 살해 된다)   

에르게네 쿤은 예전 집사에서는 아르카나 쿤’, 사국사아르카나 콘으로 쓰는데 이는 발해서경(渤海西京)이라는 별칭을 가진 발해의 수도급 행정구인 압록강네 ()’(압록강 나의 군)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발해어 행정구 이름이 734년경에서 집사가 편찬되는 1310년경까지 근 58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 또 고구려/말갈어(발해어)몽골어투르크어페르시아어를 거치면서 압록강 나의 군아로강나 군아르가나 콘이라는 투르크/몽골어로 음가 변화를 거쳤다는 것이다.    

이때 아르가나 콘으로 도망간 칭기스 칸의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네쿠즈 중에 키얀은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손자 ()’입니다. 또 두 번째 인물 네쿠즈는 님금이란 이름을 페르시아어로 링쿰(Linqum)’이라고 적고 한자로는 닛곰(捏昆, 날곤)’으로 적은 이름의 변화형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는 바로 그 전설적 전쟁의 주역이었던 발해 제2대왕 무왕 대무예의 아들 발해왕자 도리행(都利行)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도리행은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형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한 숙부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독살당한 차기 왕감이었죠. 도리행(都利行)이 바로 집사다를라킨(Darlaqin)이라고 기록한 인물인데, 님금, 니쿠즈는 그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죠.”

 

콩그라트 지파가 아르가나 콘을 빠져 나온 이야기   

 

전 박사는 그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과정이 700년 전 쓴 집사아르가나 콘 탈출기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탈출한 발해 왕가의 일족이 칭기스 칸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오늘날 여러 종족으로 분화되는데 그 내용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골족의 아르가나 콘 탈출은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나온 종족은 콩크라트종족의 시조인 황금항아리가 이끄는 부류로, ‘다른 종족과 상의도 없이 다른 종족의 쇠를 녹여 연장을 만드는 용광로지를 짓밟고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이때는 탈출이 아니라 발해 10대 왕 선왕(宣王)의 밀지를 받고, 압록강네 군을 빠져 나와 그 전설적인 타타르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 발해-·신라전에서 잃어버린 발해의 남쪽 땅과 북쪽의 흑수 땅 등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흑수 등 말갈 고을들을 치러 출정한 것입니다.    

발해의 남쪽 땅이라고 제가 표현한 땅은 평양의 대동강에서 한강 이북 땅을 말하고, 원래 고구려 땅이자 발해 초기의 땅입니다. 이 땅을 되찾기 위해서 콩그라트 종족이 뛰쳐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공격에서 발해가 이겼던 것이 확실합니다. 동방사서 통감등 당나라 측의 사정을 적은 사서들은 선왕이 바다 북쪽의 말갈 등을 쳐서 땅을 크게 넓혔다고 합니다. 또 신라 측 기록도 발해와 신라 국경이 한수 이북으로 바뀌었음을 기록합니다. 또 이때부터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기 때문입니다.”

 

-좀 전에 콩크라트 종족의 시조라는 황금항아리는 또 누구인지요.    

놀랍게도 이분은 우리 고려사<우리 평주의 중 금행(今幸) 아들 극수(克守: 함보)가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가나 콘을 떨쳐 일어나 발해의 남쪽 주군을 회복한 이 황금항아리 즉 금행은 황해도 평주를 수복했습니다. 곧 그들은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증조부 때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황금항아리’ ‘금행(金幸)’<고려사>의 서문 격으로 왕건의 선조를 기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는 왕건의 외증조부로’ ‘서해용왕(西海龍王)’으로 기록되었고, 이 칭호를 쓰며 그곳을 다스립니다.”   

전원철 박사는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서해’, 발해바다를 말하고 용왕(龍王)’은 그가 정말 구렝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는 우리말의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발해-고려식 향찰(鄕札)로 적힌 칭호라고 한다.    

용왕(龍王)’()-’은 우리말로 고렝이/고레이라고 하는데, 이 소리가 고려의 옛소리인 고라이와 같아, 그 고려를 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이는 왕건의 즉위를 예고하는 도참설(圖讖說)의 비문(秘文, 비밀코드)에서도 사용한 당시의 표현방식이라고 한다. 결국 왕건의 외증조가 서해용왕(西海龍王)’이라고 쓴 것은 그가 발해(서해)-고려왕’(고레이, 고렝이, 구렁이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운영자 자료) 대만만족황실계보표 발해-금-청을 한 가계로 보고있다.

 

여진(女眞)은 조선(朝鮮숙신(肅愼)과 같은 소리값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 

 

한편 신라는 당시 금행이 회복하여 다스리던 땅을 다시 빼앗기 위해 자주 침공했다고 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발해의 내지인 반안군(盤安郡)에서도 부락이 두 개의 종족(지파)으로 서로 나뉘어 싸우는 혼란스런 일이 있어났다. 이어지는 전 박사의 설명.

신라의 침공을 받자 할 수 없이 금행과 그 맏아들, 금사에서 아고래(阿古迺), 곧 그 소리가 고구려와 같은 카고라이로 기록된 인물은 고향 평주에 남고, 둘째와 셋째 아들인 함보(函普)와 보활리가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야라(耶懶)’로 각각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약 250년 뒤 고려 예종 때인 1113년경에는 고려사에서는 여진(女眞)’으로 적히고, 금사에는 완안부(完顔部)’로 불리게 되는 지방입니다.   

형인 함보가 들어간 금사복간수(僕幹水)의 물가 땅()’에서 복간수(僕幹水)’보카리모구리(고구려, 무쿠리) 이라는 강 이름이고, 그 물가의 땅은 고려사가 오늘날의 소리로 여진 아지거촌(女眞 阿之居村)’이라고 기록한 곳입니다. 아우 보활리가 들어간 야라(耶懶)’는 당시 갸라이(고려)’라는 소리를 이두로 적은 것입니다.  

이 지명은 또 옛소리로는 코라이 땅’, 오늘날의 소리로는 고려땅이라는 지명입니다. 여진 및 고려식 이두로 적은 갈라전(曷懶甸)’이 바로 그것이고, 원나라 때 몽골어 소리를 한자로 적은 코랄라(合蘭路, 합란로)’가 같은 땅입니다. 이 둘은 조선시대 대학자 정약용 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각각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와 함경남도 함흥지방입니다.”  

 

-당시에 여진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여진(女眞)은 옛 한자 방언소리를 아직도 간직한 오늘날 일본어(日本語) 한자 소리로 죠신인 것과 같이, 예전에 그 소리가 조신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조선(朝鮮)’숙신(肅愼)’을 다른 한자로 적은 지명입니다. 이 말들을 두고 우리 학자들 대부분과 중화인민공화국 학자들은 서로 다르다고 보는데, 그것은 우리 역사를 뺏으려고 하는 이들의 잘못이죠. 그들이 누구인지는 이미 아셨겠지만요.” 

 

전 박사는 여진이라고 하니까 우리와 상관없는 별다른 종족처럼 들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여진에 대해 보완설명을 이어갔다

옛 조선, 곧 고조선에서 나온 고구려의 가닥족속인 발해왕족 대조영의 가계를 숙신의 후예라고 하는 금사의 기록을 보세요. 고구려와 발해가 한 집안이고 고구려는 옛 조선(朝鮮)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조선숙신은 한 가지 같은 것을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이 말을 후대에 와서 당시에 같은 소리 값을 가졌던 조신(女眞)’으로 쓴 것입니다.    

이 조신(女眞)을 여직(女直), 여정(女貞), 여진(慮眞), 주신(珠申)등으로도 쓰는데, 이는 모두 옛 조선(朝鮮)=숙신(肅愼)이라는 말입니다. 중세 몽골어로 이를 조르친(Jurchen)’이라고 하고 만주어로는 주션(Jushen)이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말이죠.   

오늘날 우리는 남방 한어(漢語) 방언소리를 받아들여 이를 여진이라고 합니다. , 당시의 소리로 읽어야 제대로 그 뜻 조선(朝鮮)’이 나오는 것이죠. 조신(女眞)’ 땅인 오늘날 함경북도 길주의 발해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간 이 함보의 7대손이 바로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입니다. 발해가 망한지 약 190년 후이죠.” 

 

조상의 영지인 발해 반안군으로 돌아간 칭기스칸 선조  


참고) 운영자가 이해를 돕기위해 <단기고사>의 저자 대야발의 서문을 싣는다. 사학계에서는 먼저 한단고기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위서로 취급하고 있으나 실제 구당서 권149북적열전,신당서권235의 발해 내용과 일치하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다.

신이 삼가 생각하기로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설인귀(薛仁貴)를 몹시 원망스럽게 여는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에 그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단기고사(檀奇古史)고구려사, 백제사를 전부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이 다시 고대사를 편집하고자 하여 여러 의견과 많은 사기(史記)를 참고하여 그 윤곽을 잡았습니다. (중략)신이 명을 받은 지 13년 동안 주야로 근심과 걱정을 하며, 부탁을 어길까 두려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와 옛 비와 흩어져 있던 사서를 참고 하다가 돌궐국(突厥國)에까지 들어가 탐사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원본은 임금께 올려 목판에 글자를 파서 국서고에 두고 또 그것을 베껴서 백성을 가르침으로 국민의 역사의식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왔습니다.

 

천통(天統)3133반안군왕(盤安郡王)

() 야발(野勃)은 명을 받들어 삼가 서문(序文)을 쓰나이다.

 

전 박사는 바로 반안군(盤安郡)’이 곧 칭기스 칸의 19대 조부인 대야발(大野勃)의 영지라고 말했다.   

대야발 자신이 돌궐, 곧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카자흐스탄 땅에까지 가서 사서를 구해 지었다는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저자서문에는 자신의 칭호를 분명히 반안군왕(盤安郡王)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사등에는 분명히 발해의 한 행정구를 반안군(盤安郡)’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함보 형제는 함보 형제금행키얀의 아들키얀일하야발으로 올라가는 계보에서 그들의 5대 선조인 대야발의 영지로 들어간 거지요.” 

 

-우리 학자들은 함보를 발해가 아닌 신라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요.   

분명하게 잘못된 견해입니다. 우리 학자들 중에는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신라가 망하는 936년 이후에 신라 왕족이나 유민이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함보 형제는 이보다 근 80년 앞서 857년경 발해시대에 여진(女眞) 완안부(完顔部)’가 아니라, 발해(渤海) 시대의 반안군(盤安郡)’으로 들어 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함보는 왕건보다 할아버지뻘입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이 왕건의 외증조부이고 그 아들이 함보니까요. 이 물음을 좀 차분하게 잠시만 봅시다. 아골타와 같은 시대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때이고 왕건과 같은 항렬의 시대가 금사의 발해(拔海), 곧 함보의 손자 때입니다. 그런데 왕건 조차도 이미 나이가 늙은 시절인 936년경에 신라 말대왕 김부가 그에게 귀부하여 옵니다. 고려는 이 덕택에 이른 바 후삼국 통일을 완수합니다. 그런데 왕건보다 2~3대 전에 어찌 신라왕의 아들 마의태자나, 그 유민들이 강원도도 아니고 발해의 내지인 함경도로 들어갔겠습니까?”  

 

-사서에 함보가 신라인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나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대금국지(大金國志)송막기문등에는 그가 신라인(新羅人)’이라고 적어두었고, 금사에서는 <금나라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는데, 이 때 나이는 이미 60 몇 살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학계에서는 그가 신라 사람이거나 왕건의 고려 사람이라고 잘못된 풀이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오해한 우리 학계나 재야 사학자들의 잘못된 관점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전 박사는 함보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과 동시대인이라며 이는 곧 발해와 신라가 남북국으로 대치하던 시대(함보 출생년도 대략 ?~849)의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함보의 아버지인 고려사의 금행은 <고려사 고려세계>가 비밀코드로 기록한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의 장인이므로 곧 금행은 작제건의 아버지뻘이고, 그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그 금행에게 8대 외손이 되는 이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睿宗, 1079~1122)인데, 아골타와 예종은 동시대 사람이고, 왕건과 그 외증조부 금행의 가계와 친족 계보 상 같은 항렬입니다 

결국 왕건의 할아버지 항렬이 함보이고 증조부 항렬이 금행입니다. 왕건시대 사람일 수가 없죠. 더구나 금행과 함보의 시대에 북에는 발해’, 남에는 신라’, 그 사이에는 궁예의 ‘()고구려’, 또 서남쪽에는 ‘()백제가 엄연히 병존하던 시대입니다.”    

 

고구려 건국에 참여하는 금행의 후손들

 

전 박사는 금사에서 아골타가 발해인 양복을 통해 발해 유민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했다그가 여진인과 신라인은 원래 한 가문이다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여진인 아골타 자신과 발해 왕족은 같은 집안이니, 발해인들은 발해왕족 출신인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말이지요. 아골타가 신라인 김행(金幸), 곧 권행(權幸)의 후손이었다면 그는 북국 발해의 적국인 남국 신라인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을 듣고 적국의 왕손에게 발해 유민이 들러붙겠습니까?”

 

금나라 시조 아골타가 고구려(고려)로 부터 시작 되었다가 옳다고 본다.  

 

 

-그렇군요. 오늘날 학자들이 잘못 알게 된 데에는 그들의 연구가 부족한 이유도 있지만, 처음부터 여러 기록이 좀 두서없이 기록된 이유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학자라면 사실 관계를 고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풍토 중에 하나가 사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시대나 인물의 정체를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은 주장이라도 교수나 학계 학자들의 입을 통하면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백의종군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연구해도 교수나 제도권 연구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학문적 풍토이자 사회 현실입니다.  

제 책의 본문에 실어 둔 것처럼, 두 집안의 계보에 기반하여 간단한 세대 비교도표 하나만 만들면 이미 답이 나오는데, 게으른 학자들은 이것조차 하지 않고 마음대로 글을 써서 논문 발표회이다, 언론이다, 방송에 나와서 대중을 헛된 지식으로 이끈 결과라고 봅니다.” 

 

-박사님 말씀을 요약하면 결국 함보는 시기적으로 신라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군요. 아무튼, 고향에 남았다는 금행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금행의 맏아들인 아고래, 카고라이’(고구려)의 손자로 난 아지태(阿志泰)’ 와 역시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로 태어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 때에 와서 궁예가 신라를 치고 후고구려를 세웁니다. 이 때 아지태(阿志泰)’발해 대상 랑도 남하하여 궁예의 정권에 참가하여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합니다.”  

 

-아고래가 어떻게 고구려라는 뜻인지요.   

칭기스 칸 선조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름들에 관해 설명할 필이 필요하겠네요. 제가 금행의 맏아로 밝힌 아고래(阿古迺)는 그 옛소리가 카고라이’, 고구려라는 소리입니다. 그의 손자 <금사>에는 적히지 않았고, 서방사서 행운의 정원이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칼지타이 칸(Qaljiday Khan)’이라고 적었지요.  

그런데 그의 이름이고려사아지태(阿志泰)’로 적혔습니다. 이 이름의 오늘날의 소리와는 달리 당시의 한자소리는 카지타이입니다. ‘아지태(阿志泰)’라는 이름에는 <행운의 정원>이 기록한 그 칼지다이 칸에서 다만 존칭인 ‘-이 빠진 이름이죠. 물론 소리문자로 적은 <행운의 정원> 속의 칼지다이 칸은 오늘날 우리말 클씨씨 왕(乞氏氏 王)’이라는 우리말 소리에 아주 가까이 적혔죠.    

또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는 집사등 여러 사서에서 투스부다우로 적혔는데, 이는 대씨부 대/(. )’, 대씨부의 수령이라는 이름입니다. 그의 손자로 사국사율두즈 콘(조선씨 왕)’이라고 하고, 셀렝게 부랴트인들의 역사등이 바르가 타이상 노욘이라고 기록한 이가 있습니다. 말갈어로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라는 이름이죠. 여기서 칼지다이 칸은 칭기스 칸의 부인인 부르테의 선조입니다. 바르가 타이상 노욘은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로 집사에서는 미사르 울룩이라는 사람입니다.” 

 

궁예와 장보고는 고구려 보장왕 핏줄 

 

전 박사는 이 칼지다이 칸 아지태바르가 타이상 노욘’, 발해 대상 랑(渤海 大相 郞)’이 섬긴 궁예는 스스로가 신라에 나라를 잃은 고구려인이라는 자각을 가진 혁명가였다고 말했다.  

제가 족보를 면밀히 조사해보니 궁예의 외할아버지가 궁파(弓巴), 달리 궁복(弓福)인데 이 궁파는 바로 함보의 이름과도 같은 것으로 큰 바’, 큰 가(대씨, 고씨)’를 이두로 적은 이름입니다. 함보의 이름은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에는 칸보(鐶浦, 환포), 청대에는 캄부(堪布, 감포)로도 적혔죠. 궁파(弓巴)가 바로 해상왕으로 알려진 장보고(張保皐)의 다른 이름, 아니 사실은 고구려-말갈식 성씨를 이름처럼 쓴 것입니다.” 

 

-장보고의 성씨는 장씨인데 무슨 근거로 그가 궁씨라고 연결지을 수가 있는지요.   

장보고의 한문식 성은 활 당길 장()’ 자를 써서 ()’ 으로 하고, 활의 옛소리인 코리’()로 한 성씨입니다. 이는 고려를 말하는 겹뜻말(중첩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또 몽골어로도 덮개 달린 화살통(dabčitu qor)코르(qor)’라고 합니다. 이는 몽골비사리게티(Ligeti)본을 확인해 보면 아실 것입니다만.  

장보고의 성씨 을 뺀 그의 이름은 고구려를 말하는 무구리/무쿠리/보코리인데, 이를 한자로 보코리(保皐)’로 쓴 겁니다. 맨 끝의 ‘-소리는 오늘날에도 말할 때에는 ‘-소리를 내면서도 글자로 적을 때에는 안 쓰는 이른 바 북경화(北京話)얼화(兒話)’와 같이 당시에도 안 쓴 겁니다.   

고려-무쿠리장보고는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곧 고장(高藏)의 아들로 신라에 항복한 고구려 왕족 안승의 증손입니다. 보장왕에서 치면 4대손이죠. 궁예는 그 이름이 기록 안 되었지만 사서가 말하기로 궁예는 어머니의 성씨를 따랐다고 하므로 어머니 궁씨녀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6대 외손이죠.”  

 

-이런 내용도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찾은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겠군요.   

맞습니다. 이 때문에 궁예가 신라왕궁에서 버림을 당하자, 성씨를 외가성 궁파(弓巴), 궁가(弓哥)’로 쓰고 이름을 ()’로 한 것입니다. ‘(=)씨의 후예()’, 곧 고구려 왕가의 서자가계의 후손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높은()씨의 후예()’라는 뜻이죠.” 

 

-칭기스 칸 선조 이야기가 결국 이야기가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이어지네요. 우리 역사와 이렇게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궁예를 도운 발해대상랑, 곧 금행의 막내아들 보활리의 손자가 결국 고구려-마진-태봉 창건의 주역 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죠. 그런데, 처음에는 그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궁예를 도운 왕건이 나중에는 오히려 주군인 궁예를 제거하고 자기가 새 왕이 되죠. 그런데 이 왕건은 아까 말한 대로 서해용왕(금행)의 외증손입니다. 발해대상랑과는 재종외아저씨와 조카 사이이죠. 이들은 때로 신라 땅이 된 곳에 살면서도 스스로 고구려인이라고 자부한 인물들입니다.”

 

왕건의 궁정혁명에 밀려 후고구려를 떠난 발해대상랑 

 

-말씀하셨듯이 결국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잖습니까.    

궁정혁명을 일으킨 것이죠. 궁예가 왕건 자신의 선대의 외가쪽인 아내 강()씨와 두 아들을 죽이고, 개성 호족을 억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또 궁예는 신라와 후백제를 치고, 갓 세

운 나라를 굳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지나쳤습니다. 아직은 나라의 기반이 약했죠. 후백제가 발호하고, 신라가 건재했으니까요.   

 

북쪽에 발해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그런 터에 그 지지세력을 당시 민간에 널리 유행한 불교에서 찾고, 미륵불 신앙을 지나치게 믿었죠. 또 반역을 예방하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에 심취하면서 아예 전제적인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   

이 때문에 근신들이 점점 그로부터 멀어져 갔고, 또 고구려 왕가의 외손인 왕건을 덕 있는 군주감으로 생각한 그 무리의 도움으로 결국 왕건이 정권을 빼앗아 나라 이름을 처음의 고려고구려로 되돌렸습니다.”  

 

 -그것이 칭기스 칸 선조가 우리 역사에서 분파하게 된 계기와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건지요.   

문제는 918년의 궁정혁명이 났을 때입니다. 금행의 후손인 발해대상랑이 하필이면 패자인 자기 군주 궁예 편에 섰다는 겁니다. 궁예는 왕건의 궁정혁명군에 밀려 자기의 궁성인 철원에서 머지않은 강원도 부양으로 도망했다가 미복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 곡식 이삭을 따다가 백성들에게 들켜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죠.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위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후삼국이 분열하고, 왕건이 후고구려, 즉 고려를 건국할 때까지 발해가 건재했었네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다행도 잠시였습니다. 918년에서 8년 뒤 926년 발해는 불행히도 발해 왕가의 한 집안 지파가 7세기의 수와 당나라 시대에 통치했던 거란 땅에서 새로이 일어난 추장 야율아보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발해대상랑과 그 일행은 말갈의 고향인 백두산의 압록수원에 있는 별해진(別海津) 주변, 곧 강계와 삼수, 갑산 땅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별해진은 당시 소리로는 바르카이-이고 발해-(渤海-)’을 다른 한자로 쓴 지명입니다. 부랴트어와 몽골어로는 이 소리가 조금 변해 바르고(발해)-또는 바르가(발해)-이라고 불립니다.”  

 

영원히 이 땅을 떠난 칭기스 칸의 선조   

 

전 박사는 하지만 그 뒤 몇 대 후손의 시절, 그러니까 918년과 926년에서 완안 아골타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의 시절입니다. 그들이 영원히 이 땅을 떠나게 하는 또 하나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게 무슨 전쟁이지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사실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쓰기로 하고 이번에 펴낸 제 책에서는 깊은 설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전쟁은 바로 지난 세기의 1950년대에 우리 땅에서 일어난 남북한 전쟁을 방불케하는 전쟁이 북쪽의 조신(女眞)과 남쪽의 고려 사이에 일어 난 것입니다.  

바로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 동원된 숫자는 엄청난 수의 군사입니다. 그로부터 약 490년 후인 조선시대 임진왜란 시에도 조선은 단 10만의 군대도 없었다고 하잖아요. 인구가 약 열 배는 늘어난 오늘날로 치자면 20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에서 북의 함경도로 쳐들어간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측 고려가 북측 조신(女眞)으로 쳐들어간 전쟁이죠.” 

 

-이 전쟁을 계기로 드디어 칭기스 칸의 선조들은 우리 땅으로부터 멀리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군요.    

, 그 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니다. 이 때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조 카이두와 그의 숙부 나친’, 곧 제가 볼 때 오늘날 함북 나진(羅津)을 관향이자 자기 이름으로 쓰던 이들의 시대에 그들은 이 땅 함경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옛 발해 수도 동모산을 지나는 속말수(송화강)의 지류를 따라 흑수(흑룡강)의 윗물줄기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오늘날 남()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이라고 합니다. 이 못 이름의 뜻은 제가 보기에 이는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라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 전쟁의 여파로 잘라이르(야라, 곧 함흥) 종족이 쫓기다가 카이도 8형제를 참살한 사건이 있은 후 카이도와 종숙부 나친이 오늘날의 바르고진으로 갔다고 집사는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황금항아리의 세 아들이 지파, 즉 종족으로 분화되었는데 그 지파의 후손들이 전쟁을 계기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원래 고향땅에 남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동)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종족은 압록강 건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칭기스 칸의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 때 속말강과 서북의 흑룡강을 따라 오늘날 부랴티아를 거쳐 몽골리아로 불리는 땅으로 떠나 간 것입니다.”  

전 박사는 결국 또 다시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라며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칸을 탄생시켰다고 말했다.

 

운영자 편집.

 

 

출처 : 笑 以 不 答
글쓴이 : 石柱齋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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