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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정우산기 2007. 12. 22. 15:55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1부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1부
한 일(一)자의 철학적, 역사학적 고찰 
 

이제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조상을 이야기 해보자.

본래 이전원(伊甸園)은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라는 책에 나오는데, 상고시대에 한民族의 조상이

었던 반고환인천제(盤古桓因天帝) 즉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 B.C.8937년)가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 이전원이었다.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이전원적건설자(伊甸園的建設者)'편에는 환인씨가 신강성 탑리목분지에

 있는 이전원을 건설하였다고 되어있다.

" 上帝所造, 自無理由住進上帝的伊甸園. 眞正的伊甸園其中心區就是今日新疆省的塔里木盆地.

'중국민족기원어탑리목분지(中國民族起源於塔里木盆地)'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上帝之下都, 太帝之居, 天皇被跡的聖地, 我們業已知道, 所謂 開天闢地, 首出御世的盤古氏, 乃套取苗 

等族的人類起源設.

천제의 도읍지 아래 太帝가 살고 있었다. 이곳은 天皇이 자리한 聖地이다. 아문(我們) 즉 君臣들의

가문에서는 道를 알기 위함을 主業으로 했다.

이런 일은 天地를 개벽(開闢)하게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世上에 나타난 으뜸가는 사람이 반고씨

(盤古氏) 즉 환인씨(桓因氏)이다. "

바로 12,000년전에 환인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가 도통(道統)하는것을 주업(主業)

으로 삼았다고하니 아마 지금시대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큼 엄청난 정신문명이 발달하였을 것으로

생각이된다.

성씨심원(姓氏尋源)은 청(淸)나라때 장주(張澍)가 편찬한 책을 1992년 호남성(湖南省) 악록출판사

(岳麓出版社)에서 발행한 책이다. 이 책의 서문(序文)에서 보면 " 초목의 뿌리는 곤륜산(崑崙山)이며

上古代때부터 한일자의 성을 천신(天神), 즉 하늘의 신(神)인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BC. 8937年)께서

姓氏를 사용해 왔다. " 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고려말(高麗末) 충신(忠臣)이었던 이승휴(李承休)는 삼오역기(三五曆記)를 인용(引用)하여 인류역사상

(人類歷史上) 최초(最初)로 나라가 세워지면서 한일(一)자의 姓氏가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BC. 8937年)에 이어 천황씨(天皇氏 BC. 8479年), 지황씨(地皇氏 BC. 8364年), 인황씨(人皇氏

BC. 8247年)로 이어져 내려 왔다는 사실(事實)을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밝히고 있다.

한民族은 상원갑자(上元甲子)년을 기준으로 하여 한 일(一)자의 姓氏를 사용하게 된 것은 한일(一)자가

 하늘이라는 뜻에서 한民族은 하늘의 자손(子孫)임을 의미(意味)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율곤선생의 한 일(一)자의 철학적, 역사학적 고찰에 대해서 그 한민족사와 관련된 1편만 읽어

보고 계속해서 한民族史, 苗族과 한民族을 논해보겠다.

 

'一'字의 考察 ①  


【一】

  한 일, 하나 일, 고를 일, 같을 일, 시작 일, 정성 일, 첫째 일, 날 일, 온통 일, 온 일,

만일 일, 순전할 일, 오로지 일, 한번 일, 모두 일, 합할 일, 낱낱이 일, 어조사 일,

묶을 일, 부수이름 일, 혹 일, 하늘 일, 통일 일.


   한 일(一)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 전 8937년경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 때이다. 그 당시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와 천황씨(天皇氏,B.C.8479년), 지황씨(地皇氏,B.C.8364년), 그리고

인황씨(人皇氏,B.C.8247년) 등은 모두 한 일(一)자의 성(性)을 가지고 있었다는 역사적인

기록이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있다.


  한 일(一)자가 만들어진 동기는, 도(道)에서 하나가 생겨난 것으로, 도학 서적과 육서심원

(六書尋源)에서 밝히고 있다. 따라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지은 오감(吳 )도 밝혀놓고 있으며,

 모든 도학책에서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 일(一)자가 도(道)에서 나타났다고 했으며, 태초(太初)에 처음으로 출발했다고 했다.

  그럼 도(道)란 무엇일까를 살펴보기로 한다.

  노자 도덕경(老子道德經) 제25장 상원(象源) 편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

  다시말해 도(道)에서 한 일(一)자가 생겼다는 것은 자연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자연에서 한 일(一)자가 나왔다고 한다면 과연 자연의 어떤 곳에서 나왔는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漢)자를 보면 물이름 한(漢), 은하수 한(漢)자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한문자(漢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은하수(銀河水)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古代)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B.C.8937년) 때 도(道)를 통한 성인(聖人)들이 처음으로

 한자를 만들 때 은하수를 보고 한 일(一)자를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우리들 눈에 보이는 밤하늘에 떠 있는 6천억 개가 넘는 별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걸쳐 있는

것을 한 일(一)로 보았던 것이다.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행성연구가인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라는 책 301쪽에, 밤하늘에

떠있는 은하수가 우주공간에서 보았을 때 한 일(一)자로 되어있는 것을 사진으로 공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원전 8937년경에 한민족의 선조들은 도(道)를 통한 후 지혜의 눈으로 우주공간에

 떠있는 한 일(一)자를 먼저 보았음을 뜻하고 있다.

  한 일(一)자로 되어있는 은하계는 하늘에 떠있는 고로 태극(太極)이라고 했다. 태극이란 제일

 크고 먼 곳인 중앙부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현묘(玄妙)라고 했다. 현묘란 검고 밝으면서

 빛나므로 묘한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어두운 공간세계에는 검은 곳에서 밝음이 나타나고

따라서 광명의 빛이 발생하므로 인해 참으로 묘하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한 일(一)자는 하늘에 있는 은하수이므로 한 일(一)자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은 무한대로 넓고 광활한 공간세계이므로 특히 별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별과 별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에는 보이지 않는 물방울인 소립자

(素粒子)가 뭉쳐있기 때문이다. 소립자인 물방울이 뭉쳐지면 거대한 먹구름이 이루어지는

 것이 대자연의 현상이다.

  폭우가 쏟아질 때 보면 시커먼 먹구름이 뭉쳐 뇌성 번개가 발생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 먹구름은 소립자(素粒子)의 물방울과 대기 속에 떠다니는 먼지가 함께 어우러져 생긴

 것이다. 하늘의 먹구름도 음전기와 양전기의 충돌로 인해 뇌성과 번개가 나타나면서 광명의

 빛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철학이 법칙이다. 고로 현묘(玄妙)란 검은 곳에서 묘하게도 밝은

 빛이 나타나고 우레 소리와 함께 광명이 나타남을 의미하고 있다.

  옛 조상들은 지혜의 문이 열리면서 대자연에서 일어나는 현묘(玄妙)한 도(道)의 법칙을

과학적인 이론으로 밝혔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호킹 박사가 블랙홀 이론을 밝힌 것은 최근의 일이다.
  2,500년 전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과 서승경(西昇經)에서 이미 우주(宇宙)에서

일어나고 있는 3천 개가 넘는 은하계의 블랙홀 이론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검은 공간세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대광명의 법칙인 현묘(玄妙)의 도(道)에

대해 예리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주의 공간세계는 근본이 하나임을 옛 성인들은 말하고 있다.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

 제1권 제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유일원이분이기(由一元而分二氣) 유이기이현오행(由二氣而現五行)

연후삼재입이품물유행(然後三才立而品物流行)

  근원은 하나였으나 나누어지면서 두 가지 기(氣)가 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기란 음(陰)의

기와 양(陽)의 기(氣)를 말한다.

  두 가지 기(氣)는 오행(五行), 즉 木·火·土·金·水로 나타난다.
  그후 자연에서는 삼재(三才) 즉 하늘(天)·사람(人)·땅(地)이 서게 되고 만물의 품성이 흘러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다시말해 하늘과 사람과 땅이 생기면서 만물이 오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본래 우주인 대자연은 하나이다. 즉 노자 노덕경(老子道德經)에는

생일일(道生一一)이라고 했다.

  자연의 중심부인 극(極)에서 하나인 일(一)이 발생하는 것으로 성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하나인 일(一)이라는 것은 음(陰)의 기운을 말한다.

  주자(朱子)는 태극(太極)에서 음양(陰陽)인 양의(兩儀)가 함께 나오는 것으로 잘못되어

성리학(性理學)은 많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자연의 본체인 태극(太極)에서는 하나가 나타나 둘로 나누어진다고 했으므로, 하나는 바로

음(陰)의 기(氣)를 의미한다. 다시말해 보이지않는 공간세계에서 처음으로 하나인 일(一)은

음의 기운을 뜻한다.

  성인들의 경전에 의하면 우주는 9층으로 되어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부터 아홉의 기본 숫자로

 정해진 것이 현재까지 사용하는 수의 기본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본다면 하나인 일(一)은 우주공간 세계에서 만물을 창조할 수 있는 최초의 기본

 수가 하나인 일(一)이고 음(陰)임을 알게 한다. 고로 하나인 일(一)은 하늘을 뜻하며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동시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陰)의 수인 마이너스 일(一)이 곧 한 일(一)자인

것이다.

  한자자전의 한 일(一)자 변에 하늘 천(天)자가 없는 것은 한 일(一)자가 하늘이기 때문이다.

  한(漢)자는 한(漢)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늘인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여 창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한민족은 한 일(一)자의 성을 사용해왔고, 따라서 우주의 본체와 만물의 본질이

희다는 뜻에서 흰옷을 입고 살아온 백의민족(白衣民族)이므로 천손족(天孫族), 즉 하늘의

자손이라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민족은 상고대(上古代)부터 도(道)를 통한 백성이라하여 배달민족(倍達民族)이라

 불려왔던 것이다.

  한자옥편이나 자전에는 하늘에 관한 글자가 하늘 천(天)자 외 4개의 글자가 있고 하늘을

 뜻하는 한자 중에는 한 일(一)자 말고 마를 건(乾)자가 있다. 한자자전의 한 일(一)자 편에

 하늘 천()자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하늘 천(天)자를 적어보려 한다.

  천()·천()·천()·천() 자 역시 하늘 천(天)자의 옛 글자이다.
 
  한문자(漢文字)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8364년경 지갱(地 )에 의해 간지(干支)인

율여(律呂)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한치윤(韓致奫)이 저서한 해동역사(海東繹史) 단군편에

 보면 환인씨(桓因氏, B.C.8937년) 때 이미 글자가 동굴이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고 기록

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문자(漢文字)는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 때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한문자(漢文字)는 대체로 8명에 의해 창제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한문자가 수정되거나 만들어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자옥편이나 자전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당(唐)나라 때까지 한자의 수정이나 글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석환인씨(帝釋桓因氏, B.C.8937년) 때부터 한 일(一)자의 성을 가졌다는 것을 고려(高麗)

 때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한 이승휴(李承休)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도(道)를 열기 위해 자연철학의 법칙인 오행(五行)을 암송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한문자는 기원전 8937년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게 하고 있다.

  한 일(一)자는 은하계인 태극(太極)에서 비롯되었기에 한(漢)자라 했으며, 하늘에 의해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창조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말해 한 일(一)자가 먼저 나타나는

 것은 은하계인 태극(太極)의 세계에서 보이지않는 음(陰)의 기운이 처음 나타남을 뜻한다

  밤하늘에 보이는 은하수가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한 일(一)자로 상징하여 보았다면

 은하계에서 최초로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근본적인 본질은 보이지않는 음(陰) 즉

마이너스 일(-1)이라 할 수 있다.

  우주에서 기()의 흐름을 타고 흘러내려 은하계까지 도달한 다음 처음으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음(陰)의 기운인 일(一)이 창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재론하자면 보이는 은하계가 양(陽)을 상징한 것이라면 보이지않는 현묘(玄妙)한 태극의

세계에서는 음(陰)이 발생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필자가 저술한 '한民族宇宙哲學思想' 34쪽에 보면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초의 것은

 태극에서 발생하는 것이 마이너스 일(-1)이란 사실을 도표로 기록하고 있다.

  자연은 도(道)라고 했다. 즉 자연에서 도(道)의 발생은 즉 하나인 일(一)인 것이다. 고로

 도(道)는 하나에서 시작하여 자연에 있는 만물을 창조하는 것으로 옛 성인들은 지혜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천부인(天符印)의 첫머리에서도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이라고 했다. 즉 하나가 시작된 후

 없어지면서 하나에서 시작한다고 되어있다.

천부인의 첫머리에는 자연에서 만물이 생할 수 있는 태시(太始:최초)의 조건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가 생긴 후 없어지면서 하나로 시작한다고 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음(陰)이라는 하나는 보이지 않는 기()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생하는 원리를 뜻하고
있다.

 음(陰)이 나타나면서 점점 확산되어 갈 무렵 음속에서 양(陽)의 기운인 하나가 발생하게 된다.
  음의 기운이 크게 확산되어 갈 때 음속에서 양(陽)의 기운이 자라난다. 음의 기운은 커지는

과정에서 없어질 때 양의 기운이 나타나면서 물질의 창조가 시작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말

하고 있다. 고로 천부인에서는 하나가 시작한 다음 없어지면서 하나가 생겨나 시작된다는

것을 나타낸 문장이라고 보아야한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천부인(天符印)의 첫머리인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은 공간세계

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현상을 학문적인 이론으로 엮은 것이라고 보아야한다.

  태극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 즉 일(一)의 기()는 삼라만상을 창조할 수 있는

근원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인 일(一)이라는 것은 단순히 수학적인 숫자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원리를 자연과학적이며 물리학적인 이론으로 생명이 창조되는 과정을 옛

성인들은 꿰뚫어 보았음을 엿볼 수 있다.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2부  

 묘족의 시원지 천산 

 

本人이 " 단군신화 기원은 중국 天山 "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를 본홈피 첫방문기념으로 붙인

적이 있다. 그 기사를 다시 인용해보면,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에서 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 
 
보도지면:대구 매일신문
보도일자:2002년3월21일
 
단군신화에 기록된 우리민족의 기원은 중국의 천산(天山) 일대라는 문헌자료가 제시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유래를 서역(西域)으로 확대시키면서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민족의 동진을 뒷받침하고 있어 향후 우리 학계의 중요

 연구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박은용(76) 전 효성여대 교수(인문대 국문과)는 중국 청(淸)나라 건륭 28년(1763년)에 편찬된 지리서

 '흠정서역동문지'(欽定西域同文志)에서 단군신화의 태백산 위치를 규명할 수 있는 '삼위'(三危)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며 20일 이를 처음 공개했다.
 
흠정서역동문지 4권(卷之四) '천산남북로산명'(天山南北路山名)에 적힌 삼위에 대한 설명은
 
'古天山東盡境(山海經)三危山西三百五十里曰天山… 一統志天山一名白山自哈密東北境綿亘而西…'
 
등으로, 삼위산(三危山)의 위치와 삼위산이 곧 천산(天山)이며 이를 백산(白山)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을 '산해경'과 '대명일통지' 등의 고서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흠정서역동문지는 박 전 교수가 30년전 일본 도쿄대 객원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입수한 지리서로

 한자와 만주어.몽골어.아라비아어.타밀어.티베트문자 등으로 된 희귀본이며 '삼위'에 대한 기록을

 남긴 현존 유일의 고서이다. '삼위'에 대한 이같은 문헌학적 입증은 단군신화의태백산 위치 설명을

 위한 결정적인 학술자료를 제시할 전망이다.
 
삼국유사 고조선 조는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내려다 보니 삼위 태백이 가히 널리 인간을이롭게

 할만하다 (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란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지금까지 '삼위태백'(三危太伯)

이란 글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지 못했던 게 우리 학계의 실정이다.
 
따라서 민족의 기원을 밝힌 단군신화의 태백산을 두고 주로 백두산을 가리키는가 하면 강원도 태백

산과 북한의 묘향산.구월산 등지로 해석하는 등 명확한 근거자료나 학설을 제기하지 못한 상태이다.
 
박 전 교수는 "우리 학계가 민족의 기원신화에 나오는 '삼위'란 글자가 태백을 수식하는 관용어인지,

 별도의 지명인지에 대한 학술적인 규명도 못하고 있다"며 "천산 일대의 위구르족 등과 우리 민족은

인종적.언어풍속학적으로 유사점도 많아 역사.언어.문화인류학계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神市開天經 본문 4페이지

下視 三危太白, 三危, 山名, 非今 外興安嶺也, 叉 非今 文化九月山也, 乃今支那甘肅界,
하시 삼위태백, 삼위, 산명, 비금 외흥안령야, 차 비금 문화구월산야, 내금지나감숙계,

燉煌縣所在地 三危山也, 本黎苗祖盤古, 初降之地 是也
돈황현소재지 삼위산야, 본려묘조반고, 초강지지 시야

아래를 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이 보였다. 삼위(三危)란 산의 이름(山名)으로 지금의 홍안령

(興安嶺)이 아니다. 또한 지금의 문화구월산(文化九月山)도 아니다. 지금의 지나 서역편에 있는

감숙성 경계이다.이곳은 돈황현에 있는 바로 삼위산이다. 본시 구려(九黎)와 묘족의 조상반고가

처음 내려온 땅이다. (신시를 정하다)

라는 내용이다.

天山은 지금도 天山山脈으로 불려오고 있다. 또 地名도 남아있다. 그러나 天山이 白山이니 雪山이니

하는 말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일부 학자들은 白山을 白頭山이라 하여 억지로 끌어당기고 있다.

이런 행위는 참된 歷史를 오도하는 위험한 짓이다.
 
  天山은 분명히 중국 서부 끝 국경선 주위에 있으며 따라서 南部까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반고환인(盤固桓因) 때부터 黃帝에 이르기까지 6250여년이 흐른 뒤에는 天山의 南部는 곤륜산

(崑崙山)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BC.3898년까지 유소씨(有巢氏)는 天山이었던 곤륜산(崑崙山)의 이전동산(伊甸園)에서 서석기

文化時代에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던 것이 이전(伊甸)은 우전(우전 또는 우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88년 6월 북경에서 제작한 4백만분의 1로 된 중국지도에는 우전(于田)으로 지명을 바꾸어버렸다.

 하지만 옛 문헌과 지도에는 우전(于  : 성할 전)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 많다.
 
  天山은 白山이다. 그렇다면 宇宙와 萬物 또한 흰색이다. 한民族은 대대로 흰옷을 입고 살아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며 필연적인 자연의 사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民族은 이전낙원(伊甸樂園)에서 점차 동쪽으로 이주해왔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 첫 번째가 돈황

(敦煌)의 三危太白이다. 이것은 天山이 끝나는 동쪽 부분이다. 三危太白을 三危山이라고 하며

太白山이라고도 한다. 또는 黑水三危山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黑水太白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天山의 남쪽 곤륜산 속에 이전원(伊甸園)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전 아니 이덴 또는 에덴동산은 분명히 天山이었던 곤륜산(崑崙山)에 있다. 그러므로 이전낙원

(伊甸樂園)은 한民族의 樂園이자 故土였다. 왜냐하면 이전동산은 천제울국(天帝울國)의 아홉

나라이기 때문이다. 아홉 나라는 九族을 뜻하며 九夷族이다. 九夷의 선조는 앞에서 밝힌 것과 같이

 반고한인(盤固桓因)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東夷의 선조였던 桓因氏의 부족국가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桓因은 모든 史書에서 밝혀진 대로 天山의 남쪽 곤륜산(崑崙山)정에서 東으로 이주해왔다.

그러므로 天山과 白山, 雪山은 이전낙원(伊甸樂園)과 함께 잊을 수 없는 한民族의 靈山이자 故鄕인

 것이다.

 1981년 2월 홍콩에서 발행된 이당(李唐) 著「上古史」에는(본문 2쪽 참고) 上古 때부터 내려오던

 민족은 모두동방민족(東方民族)이며, 황제(黃帝) 이후 요, 순, 하, 은, 주 (堯舜夏殷周)로 부터

고구려 주몽(朱蒙)에 이르기까지 묘족(苗族)의 후예임은 의심할바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조육대(趙育大)는 치우학연구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묘학(苗學)은 묘족(苗族)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하나의 과학이다. 지금 국제학술계에서 苗學을

 연구하는 것이 인기 있는 학설로 되었다.

중국·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오스트리아·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전문적으로

 연구에 종사하거나 혹은 전문적인 연구기구를 설치하였다. (과연 한국에 그런 연구기관이 있는가

의문 스럽다! 水原客) 이것은 묘족이 과경 민족이기 때문이다. 지금 苗族의 인구는 600여만명인데

 중국경내에 500만이 거주하고 100만이 세계 각지에 분포되어 있다. 묘학(苗學)연구를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나는 마땅히 치우(蚩尤)를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우(蚩尤)는 묘족(苗族)의 선조이기 때문에 그는 중화문명사에서 전환적 의의를 띠는 인문시조이다.

   ...중략....

 ....필자는 봉건사회의 그러한 서적과 그때 사람들의 안광과 두뇌가 당시 전설의 기록 혹은

선진유적에 대한 전용, 그 단어사용과 표현이 황제후예 화하, 대한족주의의 입장에서는 것은 국한성이

 있어 중화대지의 각 부락씨족의 평등성과 일체성을 보지 못하였다고 본다. 당시의 중화대지는 바로

 원시사회말기에 처하였는데 이른바 국가와 민족이 없었고 한족, 묘족과 기타 소수 민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당시에 다만 각지에 줄 늘어 서있는 크고 작은 씨족, 부락과 부락연맹 뿐이었다. 그들은 지반을 서로

빼앗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충돌과 전쟁을 발동하였다. 황제는 황제부락의 수령이고 치우는

구려(九黎 : 아홉나라)부락의 수령으로서 그들 사이의 전쟁은 원시사회말기 중원대지의 사회가

진보한 필연적인 현상이다. 누가 정통이고 누가 비정통이며,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누가 존귀하고

누가 비천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들의 지위는 평등한 것이다. 맑스주의 민족관은 모든 민족은

크고 작고, 언어, 발전정도를 막론하고 모두 평등하다고 인정한다. 현대의 각 民族이 이러할 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부락관계, 민족관계도 마땅히 민족평등의 시각으로서 대하고 인식하여야 한다.

이렇게 보면 황제와 치우 각자의 부락은 평등하고 사람도 평등한 것이다. 그들 사이에 누가 정통이

라고 찬양해야 하고 누가 반역이라고 책망해야 하는 문제가 없다....

....중략....

....苗族은 우리나라(中國)의 비교적 큰 소수 민족의 하나로서 그 역사가 유구하다. 『苗族簡史』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일대에 매우 오랜 시기 아주 많은

원시인류가 살았는데, 그들은 世世代代로 번성하여 뻗어나갔으며 간고한 노동을 거쳐 지금으로부터

 5천년전에 점차적으로 부락연맹을 형성하였다. 그 중의 한 개 부락을 구려(九黎)라 하였는데

치우(蚩尤)를 그 수령으로 하였다."고 한다.

『묘족사』(오신복, 용백아 저, 사천민족출판사 출판)는 제 1장 "苗族의 원시시대"에 직접 "苗族의

 원조 치우"를 제일 처음의 작은 제목으로 하였다. 그리고 漢族가운데 내려오는 전설, 한문문헌을

 苗族가운데 지금까지 내려오는 "상보상낭가"(선조의 노래)의 전설, 풍속습관과 서로 비교하여

증명한 후 결론하여 말하기를 "전설시대의 치우구려부집단이 바로 이후 苗族의 최초의 先民이며

혹은 적어도 苗族의 先民을 포괄한다."고 하였다.

나는 치우는 苗族의 선조(苗族은 이미 확인하였음)일 뿐만 아니라, 그는 黃帝, 炎帝와 같이

중화민족역사에서의 3대 人文始祖라고 여긴다." 라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 한글 + 漢字문화 " 홈페이지 동이특집글을 읽어 주시기 바란다.

http://www.hanja-edu.com/0210_month/main.html


왜 천산(天山)에서 인류가 처음 생겼으며, 왜 '한民族'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율곤선생은 저서 "한民族史"에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독자여러분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타법의 한계로 인하여 세밀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간단히 개요만 논하고자 한다.
 
 본시 생명의 생성요건은 크게 보아 물(水)·빛(光)·소리(音)이다. 다시말해 氣의 분신인 3대 요건

속에 들어있는 탄소·질소·수소와 함께 단백질 입자인 미세한 유기체가 형성되어 단세포 아메바가

생긴 데서부터 생명체는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보는 견해로는 생명체가 태어난 것은

대체로 35억 년 전후로 보고 있는 것이 지배적이다.

 한마디로 아득한 옛날에는 지구의 북과 남부 지방은 극한 지대였으므로 생명체가 생길 가능성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한 시대 즉 天山 즉 白山은 온난지대(溫暖地帶) 였으므로, 인류

최초로 인간의 씨, 즉 싹이라 할 수 있는 묘족(苗族)이 생기게 되었다. 묘족의 처음 시조가 바로 인류

 최초로 나라를 세운 반고환인(盤古桓仁)이다. 반고환인씨는 모든 正史에서 기록한 것과 같이

한민족의 시조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래서 桓仁氏를 황묘(皇苗)라고 한다.

(계속)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2부

 

한민족사③ 苗族과 한民族  

 지원되지 않는 한자 때문에, 고자(古字)가 많은 부분은 스캔으로 올렸습니다.


     苗族과 한民族


  묘족(苗族)이란 최초의 사람 즉 씨앗인 사람을 말하며, 혈족(血族), 일족(一族)이란
뜻이다.
  약균(若菌)에 의해 인간이 생겨났다고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서는 밝히고 있다.


  사람은 본래 바다에서 생겼다. 즉 바다에 있던 작은 곰팡이 균에 의해 사람이 생겨났다.

이 곰팡이 균이 점차로 얽혀 무리를 지었고, 다시 큰 무리로 형성되어 갔다.
  그 약균에서 성인(聖人)이 태어났다.
성인은 서인(庶人)을 낳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淮南子 墜形訓卷四 65쪽).

  역대신선통감에서는 오황로(五黃老:水精子 赤精子 黑精子 靑精子 黃精子)가 태초에

태어나 만물이 생기고 인간이 탄생했다고 적고있다(歷代神仙通鑑卷一).

  묘족은 이상과 같이 어두운 암흑 시대에 탄생되었으므로 씨족, 또는 씨의 종족이란

뜻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럼 묘족은 언제 어디서 출현했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사기 권일(史記卷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남만(南蠻)은 삼위산(三危山:감숙성 돈황현 남)에 살던 삼묘족이 옮겨와 변한 것이다.

 삼위산은 서쪽에 있는 산이다.
괄지지에 의하면 삼위산은 그 산에 있는 봉우리에 연유되어 삼위라고 했는데, 비우산이라

고도 한다. 감숙성 사주(沙州) 돈황의 동남 30리에 있다.
  신이경에 의하면 광활한 서쪽 지방에 얼굴과 눈 손발이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형상으로 겨드랑이 밑에 날개가 있으나 능히 날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탐하거나

음란하거나 무리함에 빠지지 아니했는데, 그들을 묘민이라 했다.

  또한 산해경 대황북경에 의하면, 흑수의 북쪽에 날개 달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묘민이라 했다. 이들이 변해 서융이 되었다.

  곤( :요임금 숙부로써 치수에 실패)은 우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마융이 말하기를

극( )은 주(誅)를 말한다.…(史記卷一 漢太史令司馬遷撰五帝本紀第一)

  묘족은 위 문장에서 보는바와 같이 곤륜산 끝머리에 있는 돈황에 묘족들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고지족이다. 지금은 광서성(廣西省)의 상수(湘水) 검강(黔江) 일대의 오지에 살고있는

 묘인들을 일컫는다.
  고지족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묘족(苗族), 요족( 族), 여족(黎族), 만족(蠻族), 이족(夷族), 북족( 族), 동족( 族),

 요족( 族), 힐로(  ), 노이(怒夷), 라라(  ), 출이, 중가(仲家), 용가(龍家).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구려(九黎)와 삼묘(三苗)의 후예들이다. 

  지금 중국의 복건성과 절강성에 흩어져 살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며,

물가나 산중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들도 역시 상고 때의 그들의 후예들이다.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왔으므로 태서인(泰西人)이라 하는데, 모두 깊은 산중이나 계곡의 동굴

등에 살았으므로 고지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다음은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 있는 삼묘족(三苗族)에 대하여 찾아보기로 한다.

 묘족(苗族), 여족(黎族), 또는 구려(九黎), 삼묘족(三苗族)에 관해서는 문헌이 방대하다.

일일이 찾아 기록하려면 책을 한권 써야 할 것 같지만 본문에서는 간략하게 묘족의

발생과 시조(始祖), 그리고 한民族과의 연관성만 소개해 보고자 한다.


  附九黎三苗. 苗民謂九黎之君也. 九黎之君於小昊氏衰. 而棄善道.

上 蚩尤重刑. 必變九黎言苗民者. 有苗九黎之後. 顚頊代小昊誅九黎.

 分流其子孫爲居於西裔三苗. 至高辛之衰. 又復九黎之惡. 堯興又誅之.

 堯末又在朝.(林惠祥著 中國民族史 上 第五章 荊吳系 漢族來源之三

 附九黎三苗 本文 100쪽)

  구려와 삼묘를 보자면, 묘민은 구려군을 말한다. 구려군은 소호(小昊:黃帝의 아들)가

쇠할 무렵 선도를 포기했으므로, 본보기로 치우는 중벌을 받았다.

  구려가 변해 묘민이 되었다. 묘는 구려의 후에 생겨났다. 
  전욱의 대에 이르러 소호가 구려를 죽이자, 그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서쪽으로

간 후손들을 삼묘라 한다.
  고신씨(高辛氏:요임금의 아버지)가 쇠퇴할 무렵 다시 구려가 일어나 악행을 일삼자

요(堯)가 일어나 그들을 주살했다. 그러나 요(堯) 말기에 다시 흥기했다.


  삼묘(三苗)와 삼위산(三危山)의 관계에 대해서는 요전(堯典), 산해경(山海經),
우공(禹貢),

 한비자(韓非子), 관자(管子), 여씨춘추(呂氏春秋), 여형(呂刑), 무봉림(繆鳳林) 등 많은

사서(史書)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묘족(苗族)의 시조는 누구인지 고찰해 보기로 한다.

  신시개천경(神市開天經) 본문에 놀라운 글귀 한 대목이 있다.


  下視三危太白. 三危山名. 非今外興安嶺也. 又非今文化九月山也.

乃今支那甘肅界燉煌縣所在之三危山也. 本黎苗祖盤古. 初降之地是也.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았다. 삼위산은 지금의 흥안령이나 문화구월산이 아니다. 감숙성

돈황현에 있는 삼위산이다.
  여묘(黎苗)의 조상은 반고환인(盤古桓仁:有神氏 渾沌氏 盤古氏 桓仁氏 桓因氏 등으로

호칭했다)이다. 그가 처음 내려온 곳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71쪽을 참고해보기로 한다.


  犬戎國. 春秋時夷國. 亦名 夷. 又名昆夷在今陝西鳳翔縣北.

漢書注引山海經. 黃帝生苗龍. 苗龍生融吾. 融吾生弄明. 弄明生白犬.

 白犬有二牝牡. 是爲犬戎.


  견융국(犬戎이란 白犬의 대명사이다. 백견은 본래 氷夷라 했으며 馮夷 또는 河伯이라

한다)은 춘추 때의 이국(夷國)이다. 견이라고도 하며 곤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 북쪽에 있었다.

  한서에서 산해경을 인용해 이르기를, 황제는 묘룡을 낳았고, 묘룡은 융오를 낳았으며,

융오는 농명을 낳았다. 농명은 백견을 낳았는데, 백견의 무리들이 모여 견융국이 되었다.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十干十二支之神將與空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

君謂之諸 是謂盤固可汗也.


  십간 십이지의 신(神)과 더불어, 공공씨, 유소씨, 유묘씨, 수인씨 등은 모두 삼위산에서

 나무집을 짓고 살거나 동굴 속에 살았던 군장들이다. 이들 (견이 夷)의 수장은 한국

(汗國)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반고(盤固)이다.

해동역사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東夷有九種. 曰 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後漢書>


동이에는 아홉 종족이 있었다. 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중국 동북(東北) 쪽에 구이(九夷)가 있었다.

상고시대에는 견이( 夷)·우이( 夷)는 우이(于夷)에 속했으며, 방이(方夷)·황이(黃夷)·

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남이(藍夷)는 풍이(風夷)에 속했다. 그리고 양이(陽夷)

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海東繹史 卷第一世紀一東 總紀 韓致奫著).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7쪽에는 이전원(伊甸園:에덴 동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伊甸園. 依創世紀說本來就在東方. 而塔里木盆地.

事實上恰該便是伊甸園所在的東方. 中略. 焉耆之東.


  이전원은, 창세기설에 의하면 본래 동방에서 유래되었다. 즉 탑리목분지이다. 실재적으로

 이전원은 동방에 있었다…언기의 동쪽이다.

  언기는 전술한바와 같이 신강성의 천산산맥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언기(焉耆)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가르는 지점이라는 뜻이다.

  언기의 동쪽은 조선의 땅이었다. 하지만 서쪽도 그 옛날 한국(汗國 桓國 韓國)이었음을

잘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묘족(苗族)의 최초 시조는 반고환인(盤古桓因)이다.
  환인(桓因)의 묘족은 삼묘(三苗)로 나누어진다.
  한(桓)·한(韓)·한(漢)이다. 삼묘(三苗)의 한(桓)·한(韓)·한(漢)은 후에 한(汗)으로 글자가

바뀌어졌다. 신라의 거서간(居西干)·마립간(麻立干)이라든지 몽고의 성길사한

(成吉思汗:칭기스칸)이 그러하다.


  한은 최초로 일(一)에서 시작되었다.
  일(一)이란 하늘 천(天)이며, 태극의 본체다. 그러므로 태극은 일(一)이며 하늘이다.

  태극(太極)에서 일(一)로, 그리고 간(干), 후에 천(天)으로 발전됨을 알 수 있다.

  천(天)은 건(乾)·간(幹)과 통용한다.
하늘을 지칭하는 글자를 통칭하는 것이 한(汗)자이다. 사서(史書)에 한(桓)자로 나오는

 것은 별로 없다. 한(韓) 아니면 한(漢)이며, 그후에 나온 것이 한(汗)이다.

  한자(漢字)는 한 일(一), 두 이(二), 석 삼(三)에서 음양(陰陽) 배합, 오행(五行)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수·목·화·토·금(水木火土金)의 순서는 옥편을 이루는 뿌리와 같다. 그런

뜻에서 출발한 것이 한民族의 사상이다.

  환인씨(桓因氏) 때부터 목덕왕(木德王)이라 별칭한 것은 최초로 시작되는 인간의

정사(政事)라는 뜻이 담겨있다.

  묘족(苗族)에서 삼묘(三苗)로, 삼묘(三苗)에서 구이(九夷)로 갈라져 나갔다. 구이(九夷)

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해동역사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東夷有九種. 曰 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後漢書>

  동이에는 아홉 종족이 있었다. 견이·우이·방이·황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중국 동북(東北) 쪽에 구이(九夷)가 있었다.
  상고시대에는 견이( 夷)·우이( 夷)는 우이(于夷)에 속했으며, 방이(方夷)·황이(黃夷)·

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남이(藍夷)는 풍이(風夷)에 속했다. 그리고 양이(陽夷)

와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海東繹史 卷第一世紀一東 總紀 韓致奫著).


  단군조선 제1기 제1대 반고환인으로부터 44대 62씨 5,038년간은 평화시대였다.

  단군조선 제2기는 25대 101代 氏를 거치게되는 1,468년간은 전화의 소용돌이가 심한

시대였다. 변화의 조짐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 파란이 많았고 사람들의 이동이 심한

복잡한 사회구조로 변해가던 시대였다.

  단군조선 제3기로 접어들자 요(堯, 이름은 放勳 또는 中華)임검의 등극으로 사회가

안정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하(夏)나라 때 흉노(匈奴)·북적(北狄)·북융(北戎)이 잇따라

 생겨나게 되고, 사회는 또다시 혼란의 조짐이 나타났다.

  은(殷)나라 때에 이르러 36국이란 나라가 도처에 진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주(周)나라가

 들어서자 약 2백 국이라는 소국(小國)이 난립하게 되고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묘족(苗族)은 삼묘(三苗)로, 삼묘(三苗)는 다시 구이(九夷), 구이(九夷)에서 팔적(八狄)·

칠융(七戎)·육만(六蠻)으로 갈라지면서, 인구의 팽창은 가속화 되었다. 그에 따라 한民族

의 조상인 묘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묘족은 일(一)자 성에서 갈라져 많은 성씨를 타고 내려왔으며, 복희씨 때에

 이르러 성씨는 희(姬)씨로서 40개 나라 이상 뿌리를 이어 내려왔다. 그리고 희(姬)성의

형제 나라가 15국이었으며 제후국은 70여개국이었다. 이외에도 소왕국은 1천8백국이라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기록하고 있다.

  이와같이 본다면 환인(桓因)의 나라 한국(桓國)이 정통국(正統國)이었고 배달국시대에

 접어들어 유웅국(有雄國)이 세워지면서 적통은 유소(有巢)환웅으로 이어지고 이후

묘족의 뿌리는 한없이 뻗어나왔다(역대신선통감 제4 제8절 참고)

  묘족의 맥을 이어준 사람은 황제(黃帝)였다. 황제는 유웅국(有雄國)이었던것을 치우와

전쟁을 치르면서 유웅국(有熊國) 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황제가 용묘(龍苗)라는 사실은 역대신선통감에 잘 나타나 있다. 용묘의 시조는 반고환인이다.
대대로 선(禪)을 통한 사람이 대통을 이어 내려오는 것이 상례였다. 왕의 아들이나 군신

(君臣)이 아닐지라도 선(禪)을 통한 사람이면 대권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묘족은 한民族의 선조이며, 한민족의 뿌리는 묘족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 3부

이 장에서는 앞글(율곤선생의 苗族과 한民族)에서 소개되지 않은 몇 가지 묘족관련 인용문과

삼묘족에 대해서 그리고 묘족(苗族)이란 명사의 일반적인 개념과 세부적으로 검토해본 개념들을

 정리 해 보기로 한다.

'처음으로밝혀진 한民族史' 제1장 韓民族의 始原에 다 나와있는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원문은

생략하고 해석부분만 인용하여 기록한다.

소련 유엠 뿌진의 저서인 고조선편에도 중국의 돈황이 있는 삼위산이 그 모습을 갖추었을 때

삼묘족의 체제는 완전히 정비될 것 이라고 쓰고 있다. (國史編纂委員會譯刊行)

古朝鮮 제2章 第1절 神話時對, 壇君朝鮮  유엠 뿌진 著

"한국어 사전에서 삼위와 태백을 풀이해 놓은 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와 태백은 삼위산과

태백산이다.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의 돈황현 남쪽에 있으며 태백산은 장백산의 이름이다.

삼국유사에 기술되어있다.

삼위산은 상서 우공편(禹貢篇)에도 언급되어 있다. 삼위산이 그 모습을 갖추었을 때 삼묘족의

 체제는 완전히 정비 되었다. .....중략....  중국의 사학자 고힐강(顧 剛)과 중국고대지명사전

역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昭公9年 두정(杜頂)이 左傳에 붙인 주석을 보면 삼위산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삼위산은 과주(瓜州) 즉, 현재의 돈황현에 위치해 있다. 돈황현 남쪽에 당하(黨河)

근처에 삼위산이 있다. 이 산이 곧 우공편에 실려있는 삼위산이다. 수경주에도 역시 이 산의

소재가 삼위산은 돈황현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사기(史記) 역시 삼위산은

감숙성의 우산산맥(羽山山脈)과 섬서성의 진영산맥 아이에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몇가지

 세부사항만 제외 한다면 중국의 모든사료들은 삼위산의 위치를 감숙성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삼묘족의 발생지가 삼위산이라는 것을 중국고금지명대사전663쪽을 인용하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모든 구려족도 삼묘의 후손이다.  태서인(泰西人) 즉, 실크로드에서 살았는데 모두들 깊은 산

계곡으로 들어가 높은 산에 사는 부족(高地族)이 되었다. 여러종류의 인종들이 중국내륙지방에

사는 최고오래된 토착인이었다.

그후 황제와 치우는 북경의 들에서 십년간 일흔세번을 싸웠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황하이남으로 내려갔다.

도당씨 때도 묘족이 항명을 했으며 요임검도 단수(丹水) 이남까지 원정을 갔다. 사실 강을 건너

무리들이 달아난 것이나 다를바 없다.

순임검 때도 도망가서 삼묘의 본고향이었던 삼위산(三危山)까지 숨었던 때가 있었다. 즉, 수풀과

 나무로 위장하여 숨어살았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772쪽, 한民族史 35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도있다. (앞에서 밝힌바 있다)

" 고지족은 今苗人이다. ...중략...이름은 다음과 같다. 묘족(苗族), 요족( 族), 여족(黎族),

만족(蠻族), 이족(夷族), 북족( 族), 동족( 族), 요족( 族), 힐로(  ), 노이(怒夷),

라라(  ), 출이, 중가(仲家), 용가(龍家).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구려(九黎)와

삼묘(三苗)의 후예들이다. "

지금 중국의 복건성과 절강성에 흩어져 살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며, 물가나

 산중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들도 역시 상고 때 그들의 후예들이다.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

왔으므로 태서인(泰西人)이라 하는데, 모두 깊은 산중이나 계곡의 동굴 등에 살았으므로

고지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해경(山海經) 18권 중, 해내경(海內經), 제6 본문 p50

" 옛날에 삼묘국이 있었는데 적수(赤水)를 따라 동(東)으로 동(東)으로 사람들이 내려왔다.

 삼묘국의 자손격이라 할 수 있는 순(舜)임금이 이어받았다. (다시말해 삼묘국이 내려오는

동안 최고의 성인다운 성현(聖賢)을 배출 했다는 뜻이 된다. 上上古時代부터 삼묘국은 있었고

舜임검 이 후 春秋時代에도 있었다.)

순임검은 사람을 다치게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묘족 가운데 백성이 반란을 일으켜 남해로

내려가 삼묘국을 세우게 되었다. 바로 삼묘국은 삼모국(三毛國)이라고도 한다. "

이상의 글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묘족, 구려, 삼묘 순으로 서술하였고 苗, 黎, 三苗 모두가 묘족의

후손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묘족의 근거지가 삼위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천산에서 태초로 생겨났던 종족을 묘족이라 하였고 다시 묘족은 삼묘로

 나뉘어져 서역과 천산의 동남으로 퍼져나갔다고 본다. 또한 구려는 치우가 세운 종족으로 삼묘와

 함께 생겨났다. 엄격하게 대별하자면 삼묘에서 구려가 나왔는지 구려에서 삼묘가 나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삼묘는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으로 나누어지고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 순대로 발전해 왔으므로 치우는 이들 삼묘가운데 유목족에 해당한다.

결론적으로 치우가 삼묘족의 후손인지 묘족의 후손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 이라고 했을 때 桓, 韓, 漢을 환국(桓國), 韓나라, 漢나라 인

 것으로 오해하지는 말 것이다. 단지, 글자속에 담긴 뜻으로 종족을 분류한 것이다.

환단고기 제3 신시본기 본문에는 "진나라 天文志의 말을 인용할 것 같으면 치우천황의 깃발은

여러 종류였다. 똑똑하고 밝고 지혜있고 민첩한 깃발 에서부터 어리석고 둔하고 잘못된 것도

그 후 생겨났다.이 모두는 군병들의 규율을 상징 하는 것이었다. 깃발의 상징은 치우천황에 있어

 크게 지키는 방패적인 역활을 하는것이엇다. 치우씨는 통지씨의 후예이다. 혹 창힐과 더불어

고신씨 역시 모두가 묘족인 치우씨의 후예였다. 대극성을 함락 시키자 산동성은 물론 회수

북쪽까지 진출했다. 치우천황의 영웅적인 용맹성이 먼 지역까지 전파 되었고 심지어는 깊은 곳

 그 어디던지 모르는 곳이 없었다. "

창힐이나 고신씨는 모두가 치우천황의 후손들 이고 묘족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백독경(太白讀經) 교정편 

"태백독경은 해학 이기(海學 李沂)가 지었으며 후한(後漢)때 사람으로 판단된다. 이기는 고향이

 중국의 청주이고, 231년전 중국 상해에서 간행된 역대신선통감과 문체가 같다. 후한이

망할즈음에 쓴 작품으로 판단되며 1911년 환단고기의 저자인 계연수가 다시 베껴 쓴 것을 다시

 이유립이 교정을 보았다고 한다. 중국의 정사 라고 일컫는 사기 위서 책부원구 자치통감과

맥을 같이하고있다. 상고사 로써 상당히 가치가 있는 사료이다. " 

太白讀經 訂校增註後序 본문 2939.

前有盤古共工하야, 與我神市로 竝受安巴堅之符封而繼,有羲農舜湯하야,主東以就西而與西戎諸夏로,

 聯治相混하야, 居中時用하니 亦一神市分境之始也라, 迫夫高句麗하야, 始祖 高朱蒙 聖帝는,

出自此夫餘하시니, 祖述 桓雄,蚩尤王儉之道統하시고, ---中略---

해설
전술한 바와 같이 반고씨는 더불어 신시를 정했다. 환인 안파견은 천부인을 받아 유업을 계승

하였다. 그후 복희,신농,요,순,탕을 이어 서융이었던 서이는 서역에서 동으로 옮겼다. 모든

제후국은 물론 하나라 또한 혼란속에서도 서로 서로 연방제로 다스리며 그때 그때를 이용하여

 살아 왔다. 역시 맨처음 신시를 정한것이 분계선이 되었다. 그 후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고

고주몽 성제는 시조가 되었다. 고주몽은 스스로 북쪽에서 부여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모두

옛날의 환웅과 치우왕검이 도를 통한 도맥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백독경에 보면 최초에 신시를 정한 사람은 묘조였던 반고성인 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시개천경에서도 분명히 묘족의 시조인 반고가 처음으로 신시를 정하기 위해 삼위산에 내려

 왔다고 되어있다. 반고가 최초에 신시를 정한 사람으로 환인 안파견이라고 한다면 환단고기도

정사이다.

마지막으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이런글도 기록하고 있다. 

帝王韻記 正統相專頌 32쪽 본문에
自盤古室於此, 正統之國, 凡三十四 基合二百五十二也<中略>

반고 이후 정통지국은 모두 삼십사 代이고 그 합은 252명 이다.

앞서 소개한 중국 삼조문화연구회 부회장 조육대(趙育大)씨는 치우(蚩尤)가 묘족(苗族)의

선조라고 하였고 치우는 구려(九黎)의 수령이라하였다. 苗族은 중국에서 비교적 큰 소수 민족의

 하나로서 그 역사가 유구하다고 하면서『苗族簡史』의 기록을 인용하여 "장강(長江) 중하류와

 황하(黃河) 하류일대에서 묘족이 번성한 것으로 적고 있다. 마치 구려(九黎)가 중국의 남부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하였다. 이는 지금 묘족이 남부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으므로 과거에

묘족이 감숙성동남의 삼위산에서 생겨나 북방을 근거지로 하였다는 사실을 숨기기위해서

그렇게 위장한 것일 뿐 이다.

아니면 중국이 공산화 되었을 때 역사연구는 전혀 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위대한 문화유산파괴를

 조장했으므로 극히 최근에 와서야 고대사를 본격적으로 연구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과거

공산화시대의 영향으로 황제와 치우와의 관계를 올바로 정리하지 못 한데서 오는 오류일지도

 모른다. 

뿐만이 아니라 구려족(九黎族)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 구려는 중국 남방의 전설시대에 활동한

 민족이라고 소개하고 주로 지금의 장강 유역과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및 강서성

(江西省) 일대에 분포하였다고 하였다. 이것도 마찬가지 수작 일 뿐이다.

더 한심한 것은 삼묘족을 說 한 것이다.

" 근대의 많은 사학자들은 구려와 삼묘를 지금의 묘족(苗族)의 조상으로 보고 있다. .... 삼묘족

(三苗族)은 중국의 전설시대 중 황제에서 요 순 우 시대에 이르기까지 남방에서 활동한

고대민족의 하나로서 구려의 후예이다. "묘민(苗民)" 또는 "유민(有苗)"라고도 하며, 주로

동정호(洞庭湖, 지금의 호남성 북부)와 팽려호(彭 湖, 지금의 강서성  陽湖) 사이, 즉 장강

중하류 이남 일대에 분포하였다. " 라고 하였다. 주로 남방에서 활동한 민족으로 못을 박고있는

것은 아주 잘못 된 것이다.

사기 권일(史記卷一)에 "남만(南蠻)은 삼위산(三危山:감숙성 돈황현 남)에 살던 삼묘족이

옮겨와 변한 것이다. " 한 것과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 고지족(高地族)

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묘족(苗族), 요족( 族), 여족(黎族), 만족(蠻族), 이족(夷族), 북족( 族),

 동족( 族), 요족( 族), 힐로(  ), 노이(怒夷), 라라(  ), 출이, 중가(仲家), 용가(龍家).

이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구려(九黎)와 삼묘(三苗)의 후예들이다. 지금 중국의 복건성과

 절강성에 흩어져 살고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며, 물가나 산중에 흩어져 살고있는

이들도 역시 상고 때의 그들의 후예들이다.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왔으므로 태서인(泰西人)이라

하는데, 모두 깊은 산중이나 계곡의 동굴 등에 살았으므로 고지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 것처럼

고산족이면 서역에서 왔다는 이야기이며 바로 뒷문장에 태서인(泰西人)이라 하여 한(漢)나라 때

 산을 넘어왔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남만(南蠻)이 묘족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늘날 묘족은 중국의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종족이며 그 분포지역도 다양하고 넓다. 그러나

그 옛날의 한민족의 시조 환인천제께서 처음으로 가지셨던 종족이름 묘족과는 별개의 것이다.

환인시대의 묘족은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의 공통조상이며 동아시아제족의 뿌리이다. 묘족은

어두운 암흑 시대에 탄생되었으므로 씨족, 또는 씨의 종족이란 뜻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역대신선통감에서는 오황로(五黃老:水精子 赤精子 黑精子 靑精子 黃精子)가 태초에 태어나

만물이 생기고 인간이 탄생했다고 적고있다.(歷代神仙通鑑卷一)

그 다음으로 묘족은 고산족(桓), 유목족(韓), 하백족(漢)으로 크게 나누어 졌는데 고산족(桓)은

 동남으로 이동하여 주로 하백족(漢)으로 발전하게된다. 유목족(韓)은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환단고기에 치우를 비롯하여 많은 군장들이 이들 출신이다. 구이(九夷)는 이들 삼묘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묘족(苗族)에서 삼묘(三苗)로, 삼묘(三苗)에서 구이(九夷)로 갈라져 나갔다. 구이(九夷)에서

팔적(八狄)·칠융(七戎)·육만(六蠻)으로 갈라지면서, 인구의 팽창은 가속화 되었다. 그에 따라

한民族의 조상인 묘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지금 중국의 묘족은 황제와의 전쟁 이 후 황하 건너 남쪽으로 물러난 종족과 전쟁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간 종족들이며 그 중에서 일부 무리는 요. 순. 우 때까지도 국지전을

일으켰다고 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치우의 군대는 북방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구려(九黎) 구려(句驪)로 이어진 것으로 봐야한다. 고구려는 고리국( 離國)의

뿌리에서 유래되었었다. 고리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가 부여국이다. 고구려는 고리국( 離國)

에서 구려(句驪), 고리(高 리)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음을 정사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즉, 구려(九黎)는 중국남부에 정착하지 않았으며 지금의 묘족은 옛날 구려(九黎)의 유민으로

전쟁을 피해서 남쪽으로 내려간 종족의 일부라고 보아야한다. 

三國史記 高句麗篇 28대 보장왕(寶藏王28대, AD.634년) 27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高句麗自秦漢之後』

" 고구려는 한나라와 같은 뿌리이며, 9백년간 존속했으며, 진한(秦漢)의 뒤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유목민(韓) 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하백족(漢) 이라고 한 것을 보면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로 융화한 흔적이라 볼 수 있으며 주로 물가를 주름잡고 살았던

하백족(漢)의 문화가 많이 발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게한다

 

한民族의 뿌리 苗族이야기 최종회
   
   한民族의 뿌리 묘족(苗族)이야기에서 밝힌바와 같이 삼묘족의 발생지가 삼위산이라는 것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삼묘족이 태서인(泰西人) 즉, 서역에서 왔으며 높은 산에 사는 부족

(高地族)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내륙지방에사는 최고오래된 토착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밭에서 싹이 올라온 모양에서 알수 있듯이 묘족(苗族)이란 최초(最初), 원류(原流), 시작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삼국사기 의자왕편 끝줄에...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칙삼국조선 기기고성인지묘예야...)

고구려.신라,백제의 옛조상은 성인(聖人)이었던 묘족(苗族)의 후예 라고 밝히고 있다.그기에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술더 언져서 복희,신농,소호,요임금 까지도 삼국의 시조라고 말한다.

自此而降, 豈可 記? 然則三國之始祖(자차이강, 개가탄기, 연칙삼국지시조)

라고 한 것은 "점차로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 있는 힘을 다하여 옛 조상(祖上)들의 기록을

따라했다. 그분들이 삼국의 시조다." 이때 아래쪽이란 서역쪽에서 동(東)으로 동(東)으로 내려온

 것을 말한다.

皆發乎神異, 何足怪哉此 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斯焉.(개발호신이,하족괴재차

기이지소이점제편야, 의재사언.)

"이엄청난 사실들을 모두 신화와 같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상하고 괴이하다 할만하다. 이러한

기록들이 점차로 여러편으로 다르게 전해져 본래의 뜻과는 어긋남을 말해주고 있다. "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여기서 이상하고 괴이하다 라고 인정하면서도 모두가 삼국의 시조

(始祖)라고 했다는 사실이 주목 할만하다.

사마천 사기(史記) 본문 卷二49쪽에보면 서경환인시래(西傾桓因是來) 해야 할 것을 서경인환시래

(西傾因桓是來)로 문장을 바꾸어서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융(馬融)의 말을 빌어

 治西傾山因桓水是來(치서경산인환수시래) 言無餘道也(언무여도야) 라고 하였다.

"서역(西域)쪽에서 환인이 산과 강을 타고와 다스렸다. 말없이 道를 깨우쳤다"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卷一第一節 本文3쪽 첫머리에 보면

서역(西域)에 있었던 많은 백성들과 옛 반고씨(환인)는 강(江)의 원류를 타고 점차 점차 동(東)

으로 왔다고 밝히고있다.

인류의 시조는 곤륜산(天山의 옛이름)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곤륜산, 차이탄분지,

천산산맥, 토노번분지, 파미르고원, 캐라코람산맥, 티벳고원을 중심으로 발생 하게되었다. 특히,

 낮은 사막지대는 아주 먼 옛날 바다(海)였다는데(신강성일부,타림분지,토노번분지...) 지금도

 어패류 화석이나 공룡화석 그리고 고대에 찬란했던 문화유적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기후조건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지 않았겠는가? 한때 공룡이 살았을 정도이니 12000년쯤

전 이야말로 지상의 낙원 같은 기후 였을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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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천자전(穆天子傳)과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담긴 단군신화(壇君神話)


이 이야기는 목천자전(穆天子傳)과 세설신어(世說新語)의 내용중에서 발췌하였으나, 문맥자체가

여기저기 잘려나가고 뒤썩이고 자르고 역사의 장면을 왜곡시키기 위해 망가뜨린 것을

율곤선생님이 이곳 저곳 찾아 연결 시킨것이다.

내용은 환인이 천제울국을 벗어나 무리3000과 함께 갖은 고난과 역경을 거치면서 처음 불을

밝힌곳 즉, 돈황(燉煌)으로 이주해오는 장면이다. 환웅이 무리3000을 데리고 태백산에 내려온다는

 전설의 원형이다. 이 글은 율곤선생님이 50여년간 원서연구에 힘쓴 결과 율곤선생님이

밝혀낸것이며 난맥상의 과제이므로 믿기지 않는 분이 상당히 있을 줄로 예상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논쟁은 피하고 그냥 우리상고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이 참고만 했으면 좋겠다. 될 수

있으면 책을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원문은 사정상 싣지못했습니다.>

"처음으로 밝혀진 한민족사 본문56쪽~63쪽까지 편집해서 인용함" 1990년 9월 27일 초판발행

"조상의 은덕으로 지내 왔지만 소년시절은 극히 가난했다. 그러나 그 효성만은 스스로 지극하였다.

 가난한 가운데도 곡식을 구하여 어머니에게만은 밥을 지어 올렸다. 왕은진의 말에 의하면

환인의 조상은 풀벌레처럼 굳세고 단단한 의지를 가진 선비였다. 조상은 九世동안 청렴결백한

 효자 집안이었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먹는 일은 일체 없었다. 어머니 형제가

삼형제였으며 예절이 바르고 행실이 좋았다.정절이 강하고 언행이 바르며 아름다웠다. 그리고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제후국<諸侯國>의 태자들중 서자<庶子>였던 연위경

(延尉卿---대원군 이나 안평군 처럼 왕족의 친척들의 군호를 의미함--)이 피란지 에서도 어머니

 삼형제들과 제후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상은 환인의 조상에 대한 피력-

-중략-

그 당시 있는 자들은 사람들을 무조건 농락 하였다. 어떤 사람은 벼슬을 미끼로 계집종을

마음대로 부렸다.때로는 계집종들을 백리 밖으로 끌고 가 검은 양가죽을 받고 팔았다. 楚國초국

 선현들의 말에의하면 백초국인들은---<초국 중에서도 선조격의 나라 白夷>--- 양피와

계집종을 맞바꾸었다. 건강하고 젊은 계집종만 골라 백리 밖에있는 우물물을 길어 오게하는

중노동을 시켰다.......하지만 계집종들은 말을듯지 아니하고 도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원은 말했다.

--중략--

많은 사람들을 물건처럼 가득싣고 제후국<이웃나라들 ,다시말해 큰 나라에 속해있는 작은나라들>

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수십리,수백리를 돌면서 주로 오양피---<五羊皮 검은양의 가죽을 말려

 다듬은것>----를 주고 계집종을 사기도 했다. 더더욱 괴이한것은 계집종을 사고팔때는 말처럼

 살찌고 보기좋으면 말을 물어보고 화답도 시킨다. 그리고 일도 적당히 시키고 몸매를 다듬게

하고, 그중 예쁘고 영리하면 관청일을 시킨다. 좋은옷을 입히며 목욕도시켜서 벼슬아치 에게

뇌물로도 바쳐진다. 그때부터 검은양피로 팔려 왔다고 하여 五?大夫오고대부라 이름 붙였다.

----고字는검은암양 고 ---이런 일들은 백이족에 속해있던 회남 사람들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의 소행이다.

계집종을 팔고 돌아올때는 비단을 사서 가득싣고 위세당당 하게 돌아와 뇌물로 바치면 벼슬을

받았다.

상고시대는 뇌물을 바치는것이 당연한 일 이었다. 이시기는 개인이 혼자 행상을 하는것이

아니라 관이 주도가 되어 문물을 교역 했기 때문에 일종의 세금을 내는셈 인데 그러나 지나친

물품이나 암거래등을 하여 개인이 많은 이익을 취득했을경우 뇌물로 인정되어 파면 당하거나

귀양 또는 사형에 처해 지기도 했다.

글이 너무길어 내용을 조금정리....

환인의 아버지가 뇌물관련 누명을 쓰고 귀양가는 장면이 있고 귀양길에서 벌어지는 도적떼들의

살인 방화 약탈에 대한 이야기. 난리로 인해 생겨난 유민들의 비참한 떠돌이 생활 등등이 있음.

타자가 느려서 중간생략 합니다....

이야기는 계속해서 理想世界이상세계를 건설 하려는 원대한 포부와 꿈을 품고 죽음을 무릎쓰고

 萬里만리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因인은 王족의 후예이며 생질 卽 조카였다. 왕업을 이어받을 德덕과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

대업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말없이 견문을 익혀야 했다.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종신때 까지 따라

다니더라도 꾸준히 근신하고 만물에 정통하고 매사에 순리를 다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그 어떤

사람과도 친함을 익히고 배우고 수양함이 있어야 한다는 결심 이었다.

軍군의 장군이 되었을때는 다재다능 했으며 才智재지도 뛰어나고 성품도 착했다.

丞相승상이 먼 길로 달맞이 갈때도 함께다녔다.그리고 승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엄밀히

호위한 셈이다.

여남 (汝南이란 주로 중국의 남부지방을 말함) 의 선각자 들이 말하기를 대장부로 태어 났다면

 당연히 天下천하에 뜻을 두고 나라를세울 기개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남아로 태어난 대장부 였던 因인은 어릴 때부터 고독과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지성으로 열심히

 향학에 정성을 다했다.먹을것, 입을것,덮을 것 없으면서도 伯夷백이<伯夷백이는 삼묘족 중에

맏이! 웃어른격의 夷族이족을 말함 = 東夷族> 의 후손으로서 비굴하지 않기위해서 비록 움막

집에서 살지언정 백이족의 선비로서 내가 처해 있는 길을 떳떳하게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갈 것을 다짐했다.

훗날 대장군 이란자가 반역을 일으켜 군신을 모조리 죽였다. 남자는 고자를 만들고 부녀자를

 욕 보였다.

--중략---

그때 많은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먼저 떠나 버렸다.

-중략-

탁한 세상을 떠나 살고싶었다.그리고 많은 제후들과 공신 들이 함께 이상세계(理想世界)를 건설

하려는 원대한 포부와 꿈을 품고 죽음을 무릎쓰고 만리(萬里)길을 떠났다.

<본문에서 전후위제공소(前後爲諸公所) 라 한것은 천부인세개 와 3000무리 풍백, 우사, 운사를

말함,그리고 만리를 죽을 각오로 떠났다고 한것은 곤륜산 아래 남산(南山) 끝에서 돈황까지를

말한다.직선거리는 6000里 정도 이지만 우전국 에서 일어났던 난을 피해 험준한 산길을 타고

가다 보니 만리 라고 표현 된것 같다 >

죽을 힘을 다하여 가는 도중 어머니는 병환이 더욱 악화되었다.추운날 찬바람과 얼음이 깔린곳

에서 어머니는 꽁꽁 얼어버렸다.

-중략-

온갖 정성을 다하여 치료를 하였다. 때로는 불을 지피고 몸을 녹이기도 했으나 정성을 쏟은

보람도없이 어머니는 황천길로 떠나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새들도 함께 따라죽을려고 했겠는가.

어머니의 죽음을보고 따라죽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막사 주위로 무수한 새떼가 울부지며 날아 들었다. 모든 가족,친척 들은 따라 죽으려고

 했지만 되지않았다. 나무에 목을 메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디선가 홀연히 바람이 불어 오더니 모든 나무들을 감싸고 슬프게 울었다. "


  여기까지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이 재미있다. 역사상 이씨(李氏)姓 처음으로 쓰이게 된

기록이 나타난 것이다.


" 가유일이수결자수호모항사수지 (家有一李樹結子殊好母恒使守之)
  시풍우홀지상포수이읍 (時風雨忽至祥抱樹而泣)


집안은 한일(一)자성을 지녀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은 후 아들은 나무에 목을 매달았기에

 李氏를 항상 사용해 지켜왔다. 그 때 홀연히 비바람이 몰아쳐서 (바람은)나무를 감싸고 울었다. "

李氏가 생겨난 것은 桓因씨의 효성에 의한 것이며 李氏의 姓은 이때부터 입으로 전해져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정식으로 李氏姓을 쓰면서 사용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本文에서

보는바와 같이 李氏의 姓은 구전(口傳)으로 사용한 것이 최초이자 뿌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틋 환인천황이 자라던 곤륜산 밑 우전국에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삶이 처참하게 난무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서역(西域)에서 동북쪽 방향에 있던 돈황(燉煌)에 오게되면서 부터 삼묘족

(三苗族)은 동이족(東夷族)의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깐, 환단고기를 증명하고 넘어간다. 삼성기전 하편에는 석유환국 중부차서언초

환인거우천산득도(昔有桓國 衆富且庶焉初 桓因居于天山得道)

"옛날 부자나라 였으며 서자국 이었던 환인은 우전국이 있는 천산에서 득도 하였다."라고 적고있다. 


* 고산족(高山族)


환인씨(桓因氏)는 곤륜산 깊은 산속을 배경삼아 살아 왔으므로 고산족(高山族) 이라 할 수 있다.

 高山族이 처음 생겼다 하여 桓자를 붙인 것이다.

환字를 풀면 다음과같다.

씩씩하다. 그리고 홀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나무목(木)字에 한일(一) 그리고 날일(日) 밑에

 한일(一)로 되어 있다.위에 있는 한일은 하늘을 뜻한다.가운데 있는 날일은 빛이며 氣를 뜻한다.

아래에 있는 한일은 땅을 뜻한다. 하늘이 생기자 해가 생겨 빛을 발하며 氣가 움직이므로 땅에서

 나무가 생겼다는 깊은 사상을 가진 글자가 桓자 이다.

이런 글자는 깊은 철학적 사상이 담긴 것으로 보아 고대에 깨우침이 있었던 사람이 만든것이

분명하다. (아래에 올린글 한자약사를 참고) 因자를 보면 더욱뚜렸해진다.「하늘에서 내리는

빛과 기운으로 因하여 땅에 이르니, 나무 즉, 만물이 성장하지 않을수 없다는 철학사상이 담긴

 글자가 桓자 인것이다.

최초의 환인씨(桓因氏)를 제석이라고 한다. 제일 먼저 깨달았다는 뜻이다. 나침반 처럼

정확하다고 해서 반고(盤固 )라고도 했다.상고대에 왕격인 사람을 칭할때 씨(氏)자를 사용했다.

왕중의 왕 이며 근본이란 뜻이 담겨있다. 백성민(民)자는 그런 의미에서 만들어진 글자인데

왕보다 위에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크고 지위가 높다는 뜻이다. 그래서 민심은 천심 이란 말도

있다.

그 다음에 두번째 환인은 桓仁이라고한다. 제석은 오직 한 분 뿐인 것이다. 이러한 환인들이

환단고기에는 일곱분만 나와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것이다.

帝王韻記 正統相專頌 32쪽 본문에
自盤古室於此, 正統之國, 凡三十四基合二百五十二也<中略>

라고 하였는 바 환웅의 시대가 열리기 이전에 삼십사代의 환인이 있었고 252명의 임금(환인)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명백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BC8937년에서 BC3898년까지

 5038년간이다.

지금생각하면 34대에 34명의 환인씨가 아니고 252명이라니 왠궤변? 이라 하겠으나 더이상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처음으로 밝혀진 한民族史" 권말부록에는 반고환인정통국년대표(盤古桓因正統國年代表)가

실려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환인은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이렇게 12000년전에 실존했던 인물로 연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보는 그림

마한세가 상편 첫 부분에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의 무리가 서로 다투던 세상이 있었는데 그 시대는 한웅천왕(桓雄天王)

께서 군임하던 시기이며 환족(桓族)은 고산족(高山族)으로 유목과 농경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들 환족은 모두 구황(九皇)으로 한세대 이며 묘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구황(九皇)이란  반고환인의 형제가 아홉으로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천황시대(天皇時代)

를 이어왔음을 말 합니다. 이에대한 기록은 산해경에도 나와있는데 원문생략하고 내용만

소개하자면

....서남 400里에는 곤륜구가 있고 이곳에는 옛 제황(帝皇)이 있었던 도읍지 이며 신(神)이라고

 불리우는 육오(陸吾)가 벼슬을 하여 맡고 있었다. 그 형상은 신(神)이라고 했으며, 호랑이 몸에

 아홉꼬리가 있었고 사람얼굴에 호랑이 발톱이 있었으나 신(神)이라고 했다. 이곳은 천자가

아홉부족을 다스리는 동산의 시절이다. ....... (산해경 권2 서산3경 중에서  일부해설)

본문에서 곤륜구는 탑리목분지에서 출발하여 곤륜산에 이르는 살기좋은 땅을 말하며 바로

곤륜산아래에 탑리목분지에 천제울국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옛 제황(帝皇)이 있었던 도읍지

이며 호랑이 몸에 아홉꼬리가 있었다고 하는것은 제황(帝皇) 환인씨의 나라가 아홉國이

있었다는 말이며 호랑이부족 이라는 말 입니다.

천제울국은 인류최초로 이전원(伊甸園) 이라는 곳에 도읍을 한 나라입니다. 이전원은 중국말로

 이덴웬 이며 유럽에서는 에덴동산 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천자가 아홉부족을 다스리는 동산의

 시절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한세가 와 산해경에서 보듯이 호랑이 부족은 곰부족과 함께 한민족의 근본조상이 분명한것

 입니다. 아홉개의 나라로 흩어져 구주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곤륜구(崑崙丘)의 위치는 우전이라 표시해 놓은 남쪽언덕을 말합니다.


고대사에 등장하는 남산의 총체적인 모습입니다.

남산 줄기는 모두 고대 번성했던 문명의 중심지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위의 南山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였던 탑리목분지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곤륜산맥을 南山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남산 위쪽으로는 고대 번성했던 도시들입니다.

출처 : 아나무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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