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스크랩] 팔기군2만으로 명군27만 괴멸시키다(싸얼후 대전)

정우산기 2008. 1. 7. 15:29

 

'만주'한겨레(쥬신)인 麗振(려진)은 자신들을 신라의 후예라고 하며 성씨도 金(애신각라)으로 하고 다시한번 고토회복에 나서는데, 이것을 이룬 증거가 '청(靑)'제국입니다. 이때 반도(한반도)의 한겨레(리성계 조선정권)는 새끼중국노릇을 자청하며, 한겨레의 웅혼한 기상을 모조리 말살해 버리고 거지노예정신인 사대주의를 국시로 지탱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30년도 못되어 다시금 국란을 자초하고 있었습니다.(소위 정묘호란, 병자호란)

 

중공화족의 명(明)나를 결정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한 대 사건이 서기 1619. 만주의 '싸얼후'에서 발발하였습니다. 이것을 싸얼후 대전이라고 합니다. 한겨레 전통 전술방식인 기마전술이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청나라는 이것을 팔기군제로 개량하여 보병중심의 명나라군대를 괴멸시켜 버렸습니다.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만의 명나라군대를 유린해 버린것입니다. 당시, 명나라군대는 27만명이었고 만주 한겨레인 청나라의 기마병은 겨우 2만명이었습니다. 27:2의 대결에서 명나라군대 27만명을 전멸시킴으로써 고려(고구려)시대,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양만춘의 중공화족 전멸신화는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명나라는 멸망으로 치닫고, 만주한겨레는 다시한번 고토회복의 염원을 이루게 됩니다. 몽골한겨레의 칭기츠칸 이후 최대의영토를 확보하게 된것이지요.

 

그런데, 청나라는 중공화족에게 멸망한게 아니라, 서양세력의 신무기를 당하지 못하여 쇄망의길로 접어들었고, 결국 어부지리격으로 중공화족이 청나라가 넓혀놓은 영토를 고스란히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중공화족은 오늘날 마치 자기들이 확장해놓은 것처럼 우기고 있고, 이를 합리화 하기위하여 서북공정, 서남공정, 동북공정이라는 무리수를 두며 하나의 중국을 강고히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순리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게 되는 법인데, 중공의 화족은 지금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아래는 김운회교수의'대쥬신을 찾아서'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것인데, '싸얼후'대전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왜 후금(청)이 신라의 후예인지 실사적으로 증명하하고 있습니다.

 

 

----------------------------------------------------------------------------------------------

 

금나라는 가장 알타이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알타이 문화의 특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무엇보다도 국호(國號)가 그렇지 않습니까? 금나라(청나라의 전신)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태조께서 말하시기를) 요나라는 쇠를 나라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쇠가 단단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삭아갈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세상에 오직 아이신(금 : 金)은 변하지도 않고 빛도 밝습니다. 우리는 밝은 빛[白]을 숭상하는 겨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이름을 아이신[金]이라고 합니다(遼 以賓鐵爲號 取其堅也 賓鐵雖堅 終亦變壤 惟金不變不壤 金之色白 完顔部色尙白 於是國號大金 : 『金史』2卷 太祖紀)."
  
  이를 보면 쥬신족들은 알타이(金)라는 말이 가진 의미들, 즉 ① 금(金)이나 쇠, ② 해 뜨는 곳 즉 동쪽(東), ③ 시작하다(始), ④ 밝다[明], ⑤ 하늘을 나는 새[鳥] 등의 의미들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만들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채혁 교수에 따르면, 북방의 유목민들 가운데는 황금 곧 쇠(金)에 대한 신앙이 있는데 쇠 소리가 나쁜 귀신을 쫓아준다는 믿음이 있어서 신앙의식에 쇠 소리가 따른다고 합니다[주채혁, 『몽고민담』(정음사 : 1984)]. 그래서 쇠를 오보에 바치기도 합니다.
  
  금나라의 사람들은 원나라 때는 원나라에 완전히 흡수되어 원나라 국민으로 살아갑니다. 그 후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다시 ① 해서여진(海西女眞 : 해서 지방에 거주), ② 건주여진(建州女眞 : 건주 지역에 거주), ③ 야인여진(野人女眞 : 극동에 거주하는 여진) 등의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大明會典』107). 이들 가운데 조선과 인접해있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흥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이 가장 강성했으며 선진적이었습니다.『요동지(遼東志)』에 따르면, 건주여진은 이미 의식주 생활이 조선이나 중국과 유사할 정도로 발전한 단계였다고 합니다(『遼東志』7).
  

 
  명나라 때의 여진족(만주쥬신). ⓒ김운회

  건주여진(建州女眞)과 조선(朝鮮)은 바로 연접하여 있었기 때문에 인적 물적 교류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물론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건주여진은 회령(會寧) 사람들과 함께 경작하여 먹었고 조선인과 대대로 혼인하며 살았기 때문에 "조선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죠(『世宗實錄』11, 19, 77, 84). 제가 전문가에게 들어보니 여진의 말은 함경도 말과 유사하여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제가 건주(建州), 건주(建州)하니까 낯설게 느껴집니까? 바로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북간도(北間島)입니다. 현재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자치주(延?朝鮮族自治州)입니다. 한국(반도쥬신) 민족문학의 대명사인 『북간도(北間島)』『토지(土地)』의 중심 무대인 곳이죠. 건주, 즉 북간도는 반도 쥬신의 독립의 터전이자 쥬신의 제 2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는 장백산(백두산) 지역이죠.
  
  이제 아시겠죠? 제가 청나라를 그저 동족(同族)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죠 ?
  
  건주여진은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 : 1559~1626)라는 반도 쥬신(신라) 출신의 희대(稀代)의 영걸(英傑)이 나타나서 만주 쥬신의 운명이 바뀝니다.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는 한국식으로 표기하면 김누루하치가 됩니다. 즉 아이신자오뤄는 경주 김씨라는 의미의 김(金)이고, 누루하치는 쥬신 고유어이므로 김누루하치가 맞지요.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명나라의 술책으로 잃고 만주와 몽골을 심하게 이간질하는 명(明)나라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다가 저 유명한 싸얼후(薩爾滸) 대전(1619)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고토회복(중국경영)에 나서게 됩니다.
  
 
싸얼후 대전과 청군의 진출로. ⓒ김운회  


  여러분 대부분은 아마 싸얼후 대전에 대해서 한 번도 들으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들었다면 쥬신의 역사도 바로 섰겠지요. 그러나 이 전쟁이야말로 쥬신의 본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족(漢族)과의 한판 승부였습니다.

 

'싸얼후'란 만주어로 울창한 숲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현재는 푸순(撫順) 인근의 오지(奧地)입니다.
  
  싸얼후 대전은 역사상 한족(漢族)과 쥬신 사이에 벌어진 최대 전쟁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태조 김누루하치는 싸얼후에서 2만의 정예 병력으로 명나라의 27만 대군을 격파하였습니다(『滿文老?』「太祖」,『滿洲實錄』5). 싸얼후(薩爾滸) 대전은 동아시아의 역사상 3대 전쟁이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이 전쟁이 중요한 것은 쥬신 기병전술의 우수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청 태조 김누루하치는 늘 쥬신 기병 1만이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당시 만주와 몽골에는 크게 만주인(만주 쥬신)과 몽골인(몽골 쥬신)이 살고 있었습니다. 몽골이란 민족적 의식은 칭기즈칸의 원나라 이후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 때까지도 여진(만주 쥬신)은 여전히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 통일적인 구심체가 없었던 것이죠. 이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요동 - 만주 - 몽골의 사람들을 모두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한 분이 바로 청태조(김누루하치)입니다.
  
  몽골이나 여진은 민족적으로 다르진 않지만 현실적으로 워낙 광대한 영역인 몽골 - 만주 지역에 소수가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통합되기 어려웠던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 이후 이 지역은 두 영걸에 의해 통합되면서 민족적 정체성을 더욱 견고하게 가지게 됩니다. 한 분은 칭기즈칸이요, 다른 한 분은 청 태조입니다.
  
  한 가지 꼭 알아 두셔야 할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몽골이나 만주인들이 별로 다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은 같지 않지만(중국도 지역별로 말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특히 광동어는 완전히 외국어입니다. 우리도 전라도 사투리나 경상도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는 서로 잘 통하지 않잖아요) 의복이나 생활방식은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청태조는 몽골도 만주와 같은 민족으로 간주합니다(『滿文老?』「太祖」10, 13, 14). 결국 만주와 몽골은 청나라 태종에 이르러서는 하나로 통합되어 중국을 경영하게 됩니다.
  

 
  청 태조(김누루하치). ⓒ김운회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1600년경에 이르면 만주쥬신(여진족)의 공동체는 혈연적인 유대가 느슨해지고 지역공동체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혈연적 유대가 강한 일부의 명문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매우 적었다는 것이죠. 즉 17세기의 만주쥬신 사회는 '씨족공동체', 또는 '씨족공동체연맹'이라기보다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는 것입니다[三田村泰助, 『淸朝前史の硏究』(東洋史硏究會 : 1973) 218쪽, 245쪽].
  
  물론 만주 쥬신 공동체라고 하면 그것이 혈연이든 지연이든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혈연적 유대가 약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쥬신 간의 차이도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혈연적 유대의 약화를 보여주는 예를 봅시다. 1595년 청 태조의 허투알라성(赫圖阿拉城)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의 기록에 따르면, 내성(內城)에는 청태조의 친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외성(外城)의 바깥쪽에는 각종 장인(匠人)들이 거주했다고 합니다(申忠一, 『建州紀程圖記』).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과거 몽골과 만주 지역에는 수십 개의 민족들이 존재했으며 그들의 차이는 매우 확연하다는 점을 배우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차이가 점점 더 분명해지는 듯이 한족(漢族)과 새끼중국인들은 떠들어댑니다만 실제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몽골과 만주 쥬신들은 동족(同族)내에서 지역적 차이로 발생하는 특수성(特殊性)들이 소멸되고 보다 공통성(共通性)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몽골·만주 지역에서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활성화되어 그나마 존재하던 이질성(異質性)이 지속적으로 소멸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건주(建州), 즉 북간도 지역의 농업생산력 증대에 따른 전반적인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통합의 핵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의 국가간의 통합이론(統合理論 : Integration theories)들 가운데서도 커뮤니케이션의 지속적 활성화가 국가간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강력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은 유럽연합(EU)의 결성에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청 태조가 만주 쥬신들을 팔기(八旗)로 조직하면서 이제 만주 지역은 왕족(王族) - 자유기인(自由旗人 - 평민) -보이(Booi : 包衣 - 노비) 등으로 엄격히 구분됩니다.
  
  이 자유기인(이전의 일반 여진인 후금 이후 여진족 평민)이 바로 제신(諸申)이죠. 즉 일반적인 만주인, 즉 여진족(쥬신족)을 부르는 말인 제신[諸申 : 이 말은 쥬신(Jusin), 또는 쥬션(Jusen)으로 발음 됨. 조선(朝鮮)이나 숙신(肅愼)·직신(稷愼)의 중간 발음]은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건주부(建州部) 이외의 지역에서 후금(청나라)으로 귀순한 일반적인 여진족을 부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는 일건(Irgen : 伊爾根)이라고 하였습니다. 몽골인, 만주의 조선인 등도 모두 자유기인에 속하게 됩니다.
  
  제신(諸申), 즉 쥬신들은 이전에는 촌장이나 족장에 속하여 농업이나 유목 등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종사하였지만 후금(청나라)이 건국될 즈음에는 행동의 제약도 받으면서 납세의 의무도 지게 된 것입니다[安部健夫,『淸代史の硏究』(創文社 : 1971) 147~153쪽]. 이것이 건주(建州)의 엄청난 성장을 가져왔으며 중국경영의 경제적 기반이 된 것입니다.
  
  실제 초기 청나라가 의지할 수 있는 혈연적인 공동체라고 해봐야 30만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소 1억 이상의 한족(漢族)을 다스리는 그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국력의 누수를 방지하고 권력을 최대한 집중시키고 쥬신들 간의 연계를 강화합니다.
  
  그래서 청나라는 몽골 쥬신과 여러 형태로 민족 통합(ethnic integration)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결혼을 통한 민족 통합정책입니다.
  
  예를 들면 청나라의 경우에는 만주족 여인이 한족(漢族)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으며 만약 이를 어기고 결혼한다면 족보(族譜)에서 삭제하였습니다. 즉 만한통혼(滿漢通婚)을 금지한 것이죠. 그러나 몽골에 대해서는 철저히 혼인을 장려하는 연혼정책(聯婚政策)을 사용했습니다. 청나라 황제마다 몽골 왕공의 딸을 후비(后妃)로 삼고 청 황제의 공주와 왕자들은 몽골의 왕공의 자제와 결혼을 합니다. 이것은 만주족과 몽골족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쥬신족들 사이에서는 '민족의식(민족형성의 주관적 요소)'이 상당히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민족의식이 오늘날 '일본인', '한국인'과 같이 형태는 아니겠지요. 청나라가 1억이 넘는 중국대륙을 지배하면서 주축이 된 민족(만주족)은 순수한 의미의 극소수 만주족(10만여 명 : 1577년 기준)이라기보다는 몽골 - 만주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민족들이며 이들을 사실상 하나의 민족[쥬신, 또는 제신(諸申)]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중국을 경영한 것이죠.
  
  청나라는 베이징으로 천도(遷都)한 이후 흉노·거란·동호·몽골 등 여러 이민족을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각종 서적들을 모아서 불태웁니다[임계순,『淸史』(신서원 : 2001) 110쪽].
  
  1636년 3월, 심양(瀋陽)에서는 몽골의 대칸(大汗) 추대를 위한 쿠릴타이(부족장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때 몽골, 전체 만주인, 요하의 한족(漢族) 들이 모여 아이신자오뤄홍타이치(愛新覺羅皇太極), 즉 김홍타이치를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합니다. 이때 몽골의 16부 49추장들은 김홍타이치(청태종)에게 칭기즈칸(成吉思汗)의 천명(天命)이 내린 것을 인정하고 성스럽고 현명하고 인자한 황제라는 뜻으로 '복드세첸칸(Bogda-Sechen Khagan)'이라는 존호(尊號)를 바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제 부족들은 김홍타이치(청태종)에게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의 존호를 바칩니다. 결국 같은 말이죠.
  
  이 존호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단군왕검(檀君王儉), 즉 텡그리(고도)옹군(Tenggeri Onggun)입니다.
  
  이로써 김홍타이치(청태종)는 전체 쥬신[제신(諸申)]을 아우르는 텡그리옹군, 즉 대칸(大汗)이 되었고 대칸의 자격으로 국호를 청(淸)이라고 바꿉니다. 그리고 그는 대칸이라는 칭호대신에 황제(皇帝)로 바꾸어 중국을 통치합니다.
  

 

발췌 :김운회의'대쥬신을 찾아서'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삼신 할머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