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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시대를 나타낸 국사(韓國史)와 삼국사기 및 25사동이전 참모습

정우산기 2008. 3. 28. 14:50

< 삼국시대를 나타낸 국사(韓國史)와 삼국사기 및 25사동이전 참모습 >
  ☞ 삼국 위치를 한반도로 볼 수 없는 부분들의 실제 위치는 중화국  

< 서 언 >
高句麗 百濟 신라 가라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고 국사를 배워 왔다.
물론 그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하였으며 그래서 지명 유적 등으로 그 위치를 분명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지명으로 옛 역사무대를 파악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지명은 시대의 변천과 함께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더구나 현재 한반도의 상황으로 풀이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삼국시대 및 그 이전에 대한 기록들이 한반도 강역하고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사서를 부정하고 수정하면서까지 취사선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수정하면서까지 규명하려 해도 사서를 부정하는 문제점과 그에 따른 또 다른 의문점이 있는 것은 왜일까 ?  
그것은 삼국의 위치가 아직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삼국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역사도 왈가왈부하는 것도 삼국 위치가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하면서도 삼국시대를 나타낸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자가 쓴 사서라고 하면서 「삼국유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왜 삼국시대를 나타낸 유일한 정사 「삼국사기」가 비판받았을까 ?
한국 일본열도 및 조선 학자들은 「삼국사기」 내용이 한반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삼국시대를 나타낸 사서가 잘못되었는가 아니면 해석 자체가 잘못되었을까를 밝혀야 사서도 부정하지 않고 삼국시대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한반도 상황과 다른 것이 있는지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 1. 유연제노 오월에 고구려 백제의 수도관계 지명이 있다. >
① 사대주의자라면 쓸 수 없는 "幽燕齊魯 吳越은 高句麗 百濟땅"
「삼국사기」 최치원전에서  "고구려 백제가 전성시기에 강병 백만을 보유하고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을 점거하여 중부국가에 큰 해가 되었다."고 하였다.
고구려 백제가 평정하였다는 유연제노 오월은 한반도에 없다.
- "유주"는 연경 은성 신성 북평이 있는 하북성에,
- "연"은 삭 람 운중 안문 로성 등이 있는 산서성 중동부에,
- "제노"는 치 곡부가 있는 산동성에,
- "오"는 강소성 남부에,
- "월"은 양자강 이남을 나타내어 요 중심으로 있으니
고구려 백제는 그곳이 활동무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② 유연제노와 오월에 고구려 백제 초기와 패망때 지명이 있는 것
㉠ 고구려 초기 최대 이변 기록은 대무신왕 27년(44) 낙랑을 정벌하고 그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을 설치하니 살수 이남의 땅이 한에 속하게 되었다.

모본왕4년(49)에 한의 北平 어양 상곡 太原을 평정하였다.
태조69년(121) 선비와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은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 전사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고 기록하였고,
동일한 『후한서』에 지명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광양 탁 요대 신창(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 廣陽   遼隊 新昌)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

㉡ 고구려 말기 기록은 보장왕3년(644) 당태종은 북쪽의 양곡을 영주(營州)로 수송하고 고대인성(古代人城)에 저장하였다.  
4년(645) 정월 이세척이 유주(幽州)에 도착 3월에 유성(柳城)을 떠나 회원진(懷遠鎭)으로 나오는 것같이 하다가 북으로 용도(甬道)로 향하여 아군을 불의로 치려하였다.
4월 이세적이 통정진(通定鎭)으로부터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 )에 이러다.
부총관 강하왕 도종이 신설(新城)을 침범하였다.
이번 당과 고구려전쟁에서 당은 현토 횡산 개모 마미 요동 백암 비사 협곡 은산 후황(玄  橫山 蓋牟 磨米 遼東 白巖 卑沙 夾谷 銀山 後黃) 등 10성을 빼앗다.
(삼국사기, 당서 구당서에는 영주 고대인성 신성 은산 등 공통 지명이 있다.)  
㉢ 백제초기 온조14년(전5) 한수 이남으로 수도를 옮겼다.
㉣ 백제말기 의자왕때의 지명들이 고구려 지명의 남쪽에 있는것

의자왕3년(643)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가는 항성(項城)을 공취하려 하였다.
7년(647) 10월 의직은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무산성(茂山城)에 진주하고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을 공격하였다.
19년(659) 4월 장병을 파견하여 신라의 독산성 동잠성(獨山城 桐岑城)을 침공하였다.
20년 평원에서 대진하고 싸운다면 승패를 알수 없으나 백강으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계백이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
백제 땅에 웅진 마한 동명 덕안 금련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에 웅거.(662)
웅진의 동쪽에 대산이 있으며 지라성 및 윤성 사정책을 격파 진현성이 강에 임하여 높고 험하여 요충이다. 박성에 육박하였다.

유인궤가 군사를 요청하니 치 청 내 해에서 군사 7천명을 징발하여 보내다.
(삼국사기, 『신 구당서』에 항성 동명 덕안 마한 금련 웅진 대산 윤성 진현성 박성 치 청 내 해< 項城 東明 德安 馬韓 金漣 熊津 大山 尹城 眞峴城 薄城 淄 靑 萊 海 >등 공통 지명이 있다.)

㉤ 신라는 혁세세 19년(전39) 변한(弁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위에서 고구려 백제 초기와 말기 기록에서 북평 태원 탁 광양 한수 동명 덕안 주류성 항성 등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한반도에서는 찾을수 없는데 중화국에서는 찾을 수 있다.
즉 북평과 태원이 있는 곳에는 은산 신성 고대인성 용도가 있고 그 남쪽에 한수 또는 하수였던 황하가 있고 평원 황山 동명 덕안 백마하 대산 주류성 항성 동성 잠산 독산 등이 있다.  

왜 ? 한반도에는 없는 삼국 지명이 중화국에는 있으며 高句麗 百濟 강성할 때 幽燕齊魯 吳越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을까 ?  
지금까지 한반도에 高句麗 百濟 新羅 加羅가 있었다는 것이 잘못된 판단일까 교육되는 역사와 그 원전인 사서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니 삼국시대를 재조명해야 되는 것이다.


2. 신라방, 백제, 요서, 산동진출이라면 유연제노와 오월 사이에 있는 구리(九黎)의 치우(蚩尤),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기자 능(箕子 陵)도 진출하여 묻혔다고 해야 하는가 ?



- 동평 : 치우천자의 묘의 위치
- 거야 : 치우천자의 부인 견비의 묘의 위치
- 탁록 : 치우천자와 제후의 아들인 헌원과의 최초의 전쟁지역
- 수구 : 헌원 출생지
- 황릉 : 헌원의 묘가 있는 위치
- 곡부 : 소호금천씨묘의 위치

「삼국사기」에 있는 유연제노와 오월에는 삼국 지명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 신라 시조 소호금천씨, 고구려 시조 고신씨 관계 지명이 있다.

물론 25사 동이전 지명도 위 지역에는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 진출하였다고 하면 치우 천자, 소호 금천씨, 기자도 한반도에서 진출하여 묻혔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호칭이 똑같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한반도에도 있었다고 할 것인가 ?  
그도 아니면 치우와 소호와 기자는 한반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것인가 ?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삼국은 한반도 쪽에 있었고 朝鮮(고조선)도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있었다고 설명하여 왔다.
그리고 역사 학자들이 삼국 및 그 이전을 연구하면서 주(중화국 땅)에서 조선(한반도 땅)으로 기자를 봉했느니 아니니 하고,
百濟가 遼西 山東 등지로 진출하였다고도 하고,
한반도 신라인이 唐으로 진출하여 신라방을 두었다고도 하여
한반도에서 황해 서쪽으로 進出한 것으로 가르쳐 자부심을 심어 주려고 하였으며
더욱이 「三國史記」에서 高句麗 新羅가 소호금천씨 및 고신씨 후예라고 한 것은 事大 또는 모화사상으로 인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25사」에서는 삼국은 동이국이고 소호나 고신이 東夷라고 하였으니
결국 「三國史記」나 「25사」는 소호나 헌원이나 치우나 동이인이고 高句麗 百濟 신라 가라 倭는 동이국이므로 같다고 표현하였다.  
이제 "진출하였다" "아니다"라는 등 분분하니 삼국 활동 무대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

3. 한반도에는 없고 유연제노 오월 지역에 「삼국지」동이전 지명이 존재하는 것
「삼국사기」에서 幽燕齊魯와 吳越지역에 高句麗 百濟가 있고
사이에 최치원때 신라가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三國志, 후한서」에서도 동이의 제일 남쪽에 있는 倭는 회계 태 이주 단주 주애 담이(남월)에 있고,
그 북쪽에 한은 해가 있는 지역에 있고
또 그 북쪽에는 예가 창해가 있는 곳에 있었고,
그 북쪽에는 고구려가 북평 태원이 있는 곳에 있었고
그 동쪽에는 "옥저땅의 해주가 있다"고하여 「삼국사기」나 「25사」동이전이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史書와 같이 가르치지 않으므로 국사를 밝히기 위하여 삼국시대 기록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4. 한국인 중화국인 몽고인은 동이의 후예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
현대 국가로 보면 한국인 중국인 몽고인은 다른 국민이다.
그리고 그들이 교육받은 것으로 보면 헌원을 시조로 하는 중화국인,
단군을 시조로 하는 한국인,
징기스칸을 시조로 하는 몽고인 등을 배워서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는 분명히 東夷의 후예로 되어있다.
- 부여 고구려 예 한 왜 백제 신라 가라는 동이국이다. (25사 동이)
- 순은 동이인이다. (史記권1 : 皇甫謐云舜者都郡也)  
- 창의로부터 7세가 순이고 (昌意以至舜七世也)
- 창의는 헌원의 아들이다. (史記 권1)
신라인은 소호금천씨의 후예,
고구려는 고신씨의 후예이다. (三國史記)
북평 태원의 고구려와 해주의 옥저 북쪽에 부여가 있다. (後漢書 東夷)
헌원은 제후인 소전의 아들이다.  
구리의 천자 치우가 있다. (史記 : 黎東夷國)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민족으로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국가사관으로 史書를 해석하고 가르쳤기 때문이 아닐까 ?
① 근세조선 이후 조선인 및 대한인 그리고 한국인은 高麗 이전의 우리역사에서 민족명칭을 밝히지 않고 국가명으로 민족 호칭을 만들어서 삼국과 그 이전 東夷역사를 한반도 역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분명히 「삼국사기」도 김유신이 있던 신라는 소호금천씨의 후예로,
高句麗는 고신씨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고.

「25사」에서도 高句麗 百濟 신라 加羅 倭는 東夷國이고 舜은 東夷人이고 그 8대조가 헌원이고 그 아들에 소호금천씨가 있다고 하였다.  

순이 동이인이면 헌원이나 소호나 모두 東夷人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東夷의 최초의 나라는 九黎라고 하는데 그 통치자에 치우 天子가 있었는데 諸侯인 少典의 아들 헌원이 치우와 탁록에서 전투하였으나 서쪽으로 가서 황능에 묻히고 漢武帝에 의해서 漢部族의 시조로 모셔졌다고 하였으니 東夷의 九黎가 아시아의 공식적인 최초의 나라인 것이다.

한반도인이나 漢族은 모두 東夷의 후예인 것이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몽고인이나 東夷의 후예이므로 각 국가사관에 의한 역사 연구나 교육이 아닌 九黎를 기준으로 하는 동이민족사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 아닌가 ?

② 漢族이란 東夷에서 漢무제때 독립하려는 部族을 말하는데 다른민족 ?

『사기』에서 제후의 아들 헌원 시대에 동이국 구리에 치우천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규원사화』『한단고기』등에도 九黎시대 즉 환웅 시대까지도 삭제시키고 기준을 낮추는 것은 근세조선시대 지나족(한부족)보다 오래되었다고 하면 사대사상에 배치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도 숨기고 근세조선사관을 따라갈 必要는 없음에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

漢나라 무제에 의해서 史記를 편찬하여  헌원을 국조로 하는 支那族(漢部族)이 성립된 역사는 『25사』로 정리되고 있으니 우리는 東夷민족사를 확실하게 정립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支那族(漢部族)에 동화된 東夷로 만들어도 가만히 있으면 현재 우리는 무엇이 되겠는가 스스로 東夷 즉 우리 역사를 포기하겠다는 것인가 ?
위와 같은 기록들이 있음에도 史書를 부정하고 국가사관으로 동이족을 분열하여 알리고 있음을 밝혀서 東夷역사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5. 「삼국사기」내용이 근세조선 강역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부정적으로 보면서 修訂하며 취사선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그 시대를 나타낸 기록들
(1) 즉 高句麗 장성의 서남쪽에서 高句麗는 영양왕 11년 『신집』5권을 만들었으니 요의 동쪽에서 高句麗 장성 서쪽까지 사이에 있었을 것이고

(2) 한수(하수)서쪽이고 석문(접대방)의 남쪽에서 百濟는 근초고왕 30년에 『서기(書記)』가 쓰여졌으며,

(3) 석문, 동명, 덕안, 항성, 정주 서쪽에 있는 장안 중심 지나족(한부족)의 당 영호징이 『신라국기』를 편찬했으며,

(4) 고구려 장성 동쪽에서는 干에서 신라 국왕으로 변경한 뒤 최초로 거칠부가 남북한 강역의 역사인 『國史』를 남겼는데

위 사서와 「25사」동이전 등을 참고하여 1145년에 편찬하였으나 현존본은 1510년대의 복간본이다.

『삼국사기』『25사』동이전등 기본 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서를 부정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유는 내용이 근세조선 강역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역을 남북한 지역으로 한정하지 않고 사서를 정리하고 정리된 상태에서  강역을 찾아보면 사서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나 근세조선 강역을 우리 민족  강역으로 먼저 설정하여 놓고 사서를 맞추니 남북한에 일치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부정하게 된 것이다.
歷史를 연구하는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역사 기록 자체를 연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歷史 기록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반복하여 수정 출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그대로 複寫해서 전하여진 것이 아니라 복간 시대의 국가사관에 맞게 수정하여 편찬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보는 것이 最初의 출판물이 아니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또한 본래 내용도 시대에 따라 그 시대에 맞게 수정함으로 본래의 뜻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우리는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삼국 시대 기록을 현대 국가강역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다 보니 근세조선 강역에 합치되지 않으면 부정하게 되고 남북한에 맞추어 수정하고 취사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사서 중에서 연구하고자 하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까운 기록들을 종합하여 검토하면서 정리해야지 현재 시각으로 현대에 맞추어 사서를 부정하고 취사선택하여서 어찌 그 당시의 역사를 복원 할 수 있겠는가    

1) 『삼국사기』를 왜 부정하는 것일까 ?
「三國史記」를 부정적으로 보고 「삼국유사」를 더 좋게 평가하기도 한다.
「삼국유사」는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였고 나타낸 원본이 『삼국지』위서 동이전이라고 하였고
그 이전은 환웅 환인이라 표현하였는데 조선 이전은 『사기』에서는 九黎가 있다고 하였으며
『三國史記』『삼국유사』에는 苗裔로 나타내었고 九黎와 苗관계는
「예기」에서  국호(구리) 및 백성(묘민은 구리의 백성)으로 밝혀준다.
삼국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은 기록이 있다.

史書에는 황해 동쪽에서 高麗시대 편찬한 『삼국사기』와 東夷傳을 인용한 『삼국유사』등이 있고,
황해 서쪽에서 9세기 이전 遼의 서쪽인 장안 낙양 중심으로 출판된 正史의 東夷관계 기록이 있다.

신채호의 「삼국사기」 및 「삼국지」비판은 근세조선 강역에 삼국이 있었다고 보는 조선 국가사관이 빚은 결과였을 뿐이다.

사관이 근세조선 국가사관이 아니고 朝鮮(고조선)을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관이었다면 『삼국사기』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세조선 이후 삼국시대를 나타낸 『三國史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취사선택하고 있으며 19세기에 들어와 일본열도의 제국주의 학자들이 구체적으로 『三國史記』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는데

근세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였을 시기에는 일본제국의 학자들과 근세조선 국가사관을 가진 조선인들이 노골적으로 『三國史記』를 비판하는 논문들이 등장하였는데

『삼국사기』내용이 남북한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부정적인 視覺으로 보는 논문이었고 그 논문으로 등단한 학자들에 의해서 교육되었으며

光復 후에는 『삼국사기』를 비판한 학자들에 의해서 敎育된 학자들이 그 논문들을 재조명해 볼 여유도 없이 배운 대로 다시 敎育시키며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삼국사기』 내용이 남북한지역에서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敎育되어 왔다.

남북한 지역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三國史記』연구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三國史記』가 남북한 강역의 역사만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는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삼국의 강역은 『三國史記』에 나타난 그대로 연구되어야지 남북한 지역에 限定하고 일정한 틀에 맞추어 남북한역사로 규정하려 하였기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高麗 이후 삼국시대를 연구하기 위하여 『三國史記』를 연구한 논문이 과연 원본과 일치하는가를 먼저 연구하고 『三國史記』가 나타내고 있는 강역을 바르게 찾은 후에야 삼국시대를 바르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한 이후에야 朝鮮을 기준으로 하던 그 이전 九黎를 기준으로 하던 우리민족사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기록이 많은 삼국시대 정립 없이는 우리역사를 정립할 수가 없을 것이다.

原本에 맞게 정리된 이후에야 비로소 진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중국 遼중심 동쪽으로부터 남북한까지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로 기록하고 있다.  
즉 북평(부평) 태원 덕안이 있는 유연제노에서 오월까지 高句麗 百濟 新羅 강역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김부식이 모송사상을 가졌을지 몰라도 11인이 쓴 『삼국사기』는 위대한 민족사서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三國史記』 내용을 입증할 「삼국지」까지 수정하면서 인용하는 상황에 이르러고 있으나『25사』東夷傳도 황해 동쪽을 기록했다고 할 수는 없다.

『三國史記』연구에서는

- 지명의 존재지역,
- 특산물의 생산지역,
- 조공일정,
- 인구의 비교,
- 민속절의 存在지역,
- 계절풍에 의한 홍수시기,
- 바람의 방향,
- 천체의 관측지연구,
- 동식물의 이상현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유물 유적과 종합적인 檢討 하에서 비로소 삼국의 강역을 바르게 하고 삼국과 그 이전 역사를 정립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三國史記』는 과연 믿을 수 없는가 ?
    (三國史記를 믿고 근세조선사관이 아닌 민족사관으로 재정리해야 한다)


삼국시대를 나타낸 사서에는 高麗 건국부터 7대실록이 없어져서 다시 쓰여진 후
112년만에 편찬한 『三國史記』와 그후 일연이 쓴『三國遺事』가 있고,
황해 서쪽에서 三國이 존재했던 당시부터 송나라 때까지 쓰여진 『18史』東夷 관계 기록이 있다.

19세기 이전 高麗나 근세조선에서는
황해 서쪽으로 진출한 신라방이 있었다고 기록한 우리 역사책이 없었으며
또한 百濟가 현 遼西 및 山東省 등 황해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근세조선 기록이 없다.
또 그 시대 발간된 역사책에 箕子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은 곳이 없음에도 현재 교과서에는 빠져 있다.

그렇다면 왜 없던 신라방이나 百濟 진출이 기록하게 되었는가

역사 기록에 없던 것을 창조해서 기록하게 되었을까
아니면 해석하지 못했던 것을 바로 해석하여서 교과서에 收錄하게 되었을까 ?

이와 같은 상황 변화는 분명히 역사 기록에 대한 해설상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正史인 『三國史記』가 편찬된 이후 근세조선 강역에 삼국 활동무대를 맞추려 하니 삼국 시대도 정립되지 못하고 전체 역사도 定立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사기』에 대하여 근세조선 시절에는 뚜렷한 이유를 밝히면서 종합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비판하더니 국호를 大韓이라고 한 이후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光復 후에는 신채호와 같은 사관인 근세조선 국가사관의 답습에 의하여 『삼국사기』를 비평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한국에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근세조선 국가사관으로 보고 批判하였다.

국어사전에도 김부식은 "『三國史記』를 편찬하면서 중국 사서를 인용 특히 삼국 통일의 기사에는 『자치통감』을 그대로 옮긴데가 있고, 사대주의 사상 및 史實의 오류 등이 있어서 후세 史家 중에는 그를 비난하는 이도 있다."고 하였다.

정말로 『三國史記』는 사대사상으로 쓰여진 사서라고 하면서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는데  무엇을 事大하였다는 것인가 ?

批評하는 글을 살펴보고 우리는 세가지면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1)  사대사상(事大思想)이나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쓰여졌다고 비평하는 이유를 살폈다.
(2)  우리의 민족 시조와 기준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3) 『삼국사기』에 나타난 특징들

(1) 「삼국사기」를 事大思想이나 慕華思想으로 쓰여졌다고 비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본 기록들

① 『삼국사기』가 쓰여진 한 세기 뒤에 이규보(1168-1241)에 의한

"김부식이 國史를 다시 편찬할 때 동명왕의 사적을 매우 간략하게 다루었다. 그는 國史란 세상을 바로잡는 책이기 때문에 大異之事로서 후세에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간략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명왕편 서---

② 고려말조선초의 권근(1352-1409)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진삼국사전에서 "  김부식이 체제(범례)는 사마천의 『史記』의 法을 취했으나,
대의는 간혹 춘추와 다른 점이 있었고,
한 가지 사실이 여기 저기(3국의 각 본기)에 중첩되어 있다.
방언과 이어가 서로 섞어서 선정과 가모는 전한 것이 드물며 나라별로 글을 만들어 참고하기가 어렵다.
--동문선 권44 표전--

③ "김부식이 『삼국사』를 만드는데 사마천의 『史記』를 모방하여 나라별로 �고 본기. 열전. 지. 표도 있어 50권이나 된다. 같은 해를 본기에 나누어 한가지 일이 중복되어 방언과 이어를 없애지 못하였고, 범례가 적당치 못하고 책이 크고 번잡하여 보는 사람이 참고하기에 퍽 어려움을 갖는다.                              -삼국사략서 --동문선권91 서--

④ 윤준(1380-1436)도 그의 의청간행동국사략전에서

" 근래 김부식의 편찬을 본다면 부피가 많고 용장하여 읽으려면 잠이 오고 황당하며 광탄하기 때문에 입에 오르면 불경할뿐이다."
--동문선권41--

⑤ 이극돈(1435-1503)의 『동국통감』서문에도  "우리나라(東方)는 단군 기자 이래 3한에 이르기까지 그 기록이 근거가 없으며, 3국에 이르러서는 근근히 있는 것조차 조략이 심하고 더구나 터무니없는 불경지설을 첨가시켜 후세의 史家에게 이것을 계승 찬술케 하였다."라 하였다.

⑥ 안정복(1712-1791)도 『삼국사기』가 중국 기록의 보충이라는 측면은 인정 할 수 있으나  
"그 책이 소략하고 잘못된 곳이 많아 김부식은 사가로서의 규모는 거의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왕명을 받들어 역사를 편찬함에 보다 널리 문적을 두루 살피고 헌서지로를 열어 주었다면 지나치게 간단하여 식자들에게 한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순암선생문집 권10 동사문답서--

⑦ 정약용의 경우도 "김부식이 우리나라 고사가 갖는 황탄비리함을 들어 탄식할 뿐" 구체적으로 큰 비난을 하지 않았다.
--『다산전집』권1 시문집(제강역고)--  

⑧ 신채호는

㉠ 신채호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소루함이 사료의 부족이 아니라고 지적한 뒤에,

"선학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할 사료가 부족하므로 그의 편찬한 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라 하나, 기실은 역사의 병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를 분멸한 것이다."             --『조선상고사』-일천년래제일사건--

㉡ "조선의 강토를 바싹 줄이어 대동강 혹은 한강을 국경으로 정하는 한편 사대적 유교적인 입장의 사료를 부연찬탄 개작하고 그의 불합한 사료는 논폄도개 혹은 산제하였다."            
--- 『조선상고사』-일천년래제일사건--

㉢ "이종을 초하여 동종을 멸함은 구적을 위하여 형제를 살함과 무이한 자니 차의가 심명하여 비록 삼척동자라고 가히 지득할 바이어늘(중략) 황차동국통일한 공으로 기죄를 엄하려오 (중략) 연칙 김춘추 일생에는 죄만 유하고 공은 무하거늘 (하략) 이종으로 하여금 동족을 멸한 김춘추여, 차등주의를 고취하여 오국을 삭약케 한 역사가여."
--독사신론--

㉣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 때 그 초창하던 처음에는 한자의 자음을 취한 것도 있고 혹 자의를 취한 곳도 있다."
--조선상고사 41--

㉤ "김부식은 김춘추 최치원 이래에 모화주의의 결정이니 그 저한 [삼국사기]에 고주몽은 고신씨의 후예라, 김수로는 금천씨의 후예라, 진한은 진인의 동래자라 하며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가지도 같은데가 없는 지나족을 동종으로 보아 말살에 쇠 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벽견을 갈파한 자가 없었다."  --조선상고사 48--

㉥ "조선 상고에 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그러나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한자를 �을 것은 사실이다.
한자가 하시에 수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토지가 지나와 연접하여 양민족이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며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이 명백하다.
왕검의 子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를 보고 금간옥첩의 문자를 가르쳐 주었은 즉 이 문자가 곧 한자일지니 조선의 한자들 독습함이 기구함을 볼 것이니라.  
그 뒤에 한자의 음 혹 의를 빌어 이두문을 만드니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 할 수 있다.
고대에 국서 혹 향서 가명이라 칭하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칭하였다."        
--조선상고사 80--

신채호가 인용한 사서도 황해 서쪽 기록이 많다.

⑨ 최남선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 그런대로 체례가 정제하고 문사가 화미하지만 이러한 외관이 도리어 이 책의 단점이요. (중략)
후인과 타인의 안목에 번지르하게 보이게 된 것이 실은 지나사상과 한문적 기습으로서 국고의 원형을 왜뉴하고 개환한 결과이다.

유교적으로 보아 괴란한 것은 말살하기를 꺼리지 않았고 한학상으로 비야한 것은 변개하기를 서슴지 않고 자구의 편을 위해선 신축과 산첨, 취사와 전재를 예사로 하였다."    

--최남선의 삼국유사해제--

⑩ 일본열도의  사학자

㉠ "진전좌우길이 여, 제의 본기는 물론 신라본기의 상대부분은 전혀 믿을 수 없는 허구라고 주장"
--진전좌우길의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대하여'

㉡ 말송보화도 역시 " 중국사료의 기계적인 삽입, 유교적 입장제일주의, 고려왕실과 신라왕실과의 관계의 명시"

㉢ 반도충부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66회의 일식기사를 중국 문헌의 전재라고 하면서
" 일식기사는 『삼국사기』의 찬술 당시 나중에 속임수가 폭로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중국의 사서 기록를 그대로 옮겨 수공적으로 첨가하였다."      
--『삼국사기』의 일식 기사에 대하여

⑪ 김철준은 김부식의 사관이 고대적 성격과 전통적인 체질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많은 주요 사료들이 김부식의 사관으로 말미암아 소멸된 것인가를 지적한 후,
"전통적인 문화체질과 거리가 먼 모방적이고도 사대적인 유교 사관에 입각할 때 결과는 자기 전통 문화의 빈곤화, 축소화이며 외교관계기사의 풍부함도 사대주의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김철준 논문

⑫ 홍이섭은 『조선과학사』에서
"중국 문헌과 꼭 일치되는 것은 김부식이가 「삼국사기」찬술 시에 후대에 그 허구가 폭로될 줄 모르고 「한서」의 기록을 그대로 가상한 신라년대다 수공적으로 첨가했다고 보겠다.
물론 신라가 독자적으로 관측을 했고 자기네의 역사 기록이 있었으니 만치 관측 기록을 작성했다 하드라도 전설적인 건국 초대 국왕 때부터 이렇게 명료하게 세계 천문학 사상 일즉이 그 진보적인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었던 중국 측의 관측에 사소한 상위도 없이 부합한다는 것은 의심할바다.
신라보다 선진 사회인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아직 그때에는 문화 단계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고 기록하고 뒤이어 반도논문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참고 여기서 한서는 한나라 역사를 기록한 한서인지 아니면 지나족(한부족) 사서를 의미하는지 분명치 못하다.)
『삼국사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삼국사기』내용이 남북한 지역에 있었던 활동의 기록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백제는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까지 지역에 있었다고 하였음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 『三國史記』를 부정적으로 보면 믿을 사서가 없다.
유연제노와 오월에서 한반도까지 하나로 보는 역사로 나타낸『삼국사기』를 역사연구자들은 남북한 상황과 일치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내용이 기록될 수 있는 지역을 찾아야 할 것이다.  

① 『삼국사기』내용에서 『25사』동이전과 같은 공통부분이 있다.

- 고구려 백제 신라 왜는 동이국이고  소호씨 고신씨는 동이인이다.
- 고구려 백제 패망 기록은 같다.
-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기록이 같다.
- 구리(苗民) - 조선의 기자 위만 - 삼국으로 이어짐이 같다.
- 장보고 최치원의 활동무대가 같다.  
- 두 곳에 신라가 있다는 기록이 같다.

『삼국사기』『삼국유사』『25사』동이전에서 고구려 백제의 패망기록이 같고
고구려 신라 백제 초기의 기록이 같고 구리(묘)<九黎(苗)-> 조선의 기자 - 삼국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같다.

구리, 묘, 삼국이 모두 동이국이며 "고신, 소호, 순"이 모두 동이인이니
남북한만을 민족강역으로 본 현재의 근세조선 국가사관이 아닌

『삼국사기』편집자들이 삼국을 보는 사관은 아무른 문제가 없으니 사서를 믿고 정리할 뿐
취사선택의 자료가 되어서는 안된다.    

② 공통부분 위치는 유연제노와 오월 즉 요(遼)의 동쪽이며 일부 요의 서쪽도 있다.

『삼국사기』 내용이 남북한만을 나타낸다면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기록들이 있다.
평양 공주 경주를 삼국의 수도라고 말하면서 『삼국사기』 내용을 남북한 지역에 맞추려 하고 있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왜의 위치를 나타내는 내용은 지명이 있으나

『25사』동이전은 위치 배열과 각 각 지명이 있으니 그 위치를 분명히 할수 있는데
공통부분의 지명이 현 중화국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 49년에 고구려가 한의 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하였는데 북평 태원이 중화국에 있다.(고구려본기와 후한서에 있다.)
㉡ 「삼국사기」최치원전에서 "고구려 백제는 강병백만을 보유하고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여 중부 국가에 큰해가 되었다."
이들 명칭은 분명히 남북한에는 없으며 현 중화국에는 있는 지명인데
고구려 백제 땅이라고 기록했다는 자체가 사대주의자라면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다.
③  유연제노와 오월 사이에는 『삼국사기』및『중국25사』동이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지금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국사기』의 무대를 다시 연구해야 할 것이다.

4) 『삼국사기』를 입증하는 영락열제비 (永樂列帝碑 : 광개토호태왕비)
① 영락열제때 신라 백제 가라 왜는 유연제노와 오월지역에 있었다.
② 남북한은 영락열제이전부터 고구려땅이다 (干과 진흥왕비에서 비리성)
* 역성 임성 대산에서 碑利城(力城 林城 大山에서 碑利城)까지 고구려 통치지역 (고구려연방국?)

5) 삼국 역사를 나타낸 기록에는 『삼국사기』를 능가할 사서는 없다.

① 朝鮮(고조선) 이전이 기록되어 있다.
㉠ 삼국과 고신씨 소호김천씨는 동이로서 같은 동이국과 동이인이다.
㉡ 묘(苗)와 삼국은 苗는 九黎의 백성을 말하고 삼국은 九黎의 후예국가(苗裔)이므로 같다.
㉢ 묘와 구리(九黎)관계는 『예기권55』에  

- "묘구리지후", "구리위묘민선조"("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라고 하였으니
九黎는 조선과 하 이전의 동이국 국호이고  삼국은 그 후예이므로 조선 이전을 기록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삼국유사』는 최초의 국호를 조선으로 하고 있으나 『삼국사기』는 조선 이전 九黎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즉 『삼국유사』보다 오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중 2인과 묘예(苗裔)를 기록하고 있다.

소호김천씨나 고신씨나 기자 위만을 기록했다고 모화사상가(慕華思想家)로 볼 수는 없다.
현재 남북한에서 살고 한글만을 사용하고 한국인만을 民族으로 본다면 慕華思想家라 할 수 있으나

동이국 고구려 백제 신라를 우리민족 국가로 인정하는 한 동이인인 소호나 고신은 삼국의 조상으로 나타낸 『삼국사기』는 慕華思想家에 의하여 쓰여진 것이라 말 할 수는 없다.

더욱이 『중국25사』에서도 동이로 밝히고 있으니 말이다.
(史記에서 支那族(漢部族)은 東夷헌원이 九黎에서 독립하였음을 기록. 舜은 東夷人, 헌원은 舜의 선조, 헌원은 제후의 아들)

소호 김천씨나 고신씨는 지나족(支那族 : 漢部族)의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들과 삼국민이 다르다면 분명히 『삼국사기』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있다.

물론 少昊나 高辛을 직접 東夷로 기록하지는 않았으나 舜이 東夷人으로 기록되어 있고 舜의 조상이 高辛과 少昊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少昊, 高辛은 東夷이고,
東夷가 東夷를 자기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모화가 될 수 있는가 ?


김부식이 慕華思想으로 高辛씨나 金天씨를 동족으로 보아 말이 안된다고 한 것은
『중국25史』동이관계 기록에서 고신과 소호와 삼국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았어야 하는데 東夷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근세조선을 기준으로 조선족이라 밝히려 한 때문이다.  

또한 모든 기록이 남북한만의 歷史인가를 먼저 살펴보았어야 하는데 근세조선 국가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25史』동이의 위치와 삼국과 두 분이 활동했던 지역이 남북한만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25史} 동이전과의 공통부분이 있는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내용도 결코 남북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후대에 慕華思想으로 본 것은 근세조선 국가사관으로 근세조선 領域에서 우리 역사를 풀려고 하였기에 발생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으로 『삼국사기』는 『25史』동이전과 일치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강역은 幽燕齊魯와 吳越사이에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가라 倭가 있음을 밝히고 있고 남북한 신라만을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모화나 사대사상으로 기록되어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은 남북한만을 민족강역으로 보고 『삼국사기』를 비평했다 할 것이다.
조선족으로 보지 말고 기록대로 공통부분의 東夷族으로 풀었어야 오해를 줄일 수 있다.


6) 『삼국사기』가 나타낸 특징들
ⓛ『삼국사기』에는 다른 두 신라를 기록한 원전(原典) 당(唐)영호징신라국기 및  제왕년대력과 김부식 고려(高麗) 땅의 "국사"의 합본이고 다른 사서도 입증한다.

㉠ 국호 사용 년대에서 두 신라(新羅)
307년 "복국호신라(復國號新羅)"라고 했던 신라와 503년 신라(新羅)라고 했던 신라

㉡ 처음부터 왕이라고 했던 신라(『제왕년대력』의 신라 : 최치원 저)와 503년 간(干)에서 왕(王)으로 변경한 신라(고려인 김부식論)

㉢ 『삼국유사』에서는 자장법사가 신라에 왔을 때 선덕여왕 신라와 정신대왕 신라가 있다고 하였으니 두 신라를 나타냄

㉣ 『구당서』『당서』에서는 고구려 동쪽의 신라(고구려 장성동쪽 : 요사 <遼史>에서 해주 동쪽의 신라)와 백제 동쪽의 신라 (유연제노오월지간 사로신라 : 장보고 최치원 신라) (사로<泗盧> 지역과 해주 동쪽 : 요사)를 입증했다.
* 서화 항성(하남성)에서 경주(경상도)까지 하나의 민족사로 기록한 것이 『삼국사기』이다.

㉤ 낙랑국과 낙랑군을 분명히 기록하다.
* 유연제노와 오월사이에 있던 동이전과 일치되는 예(濊)의 서쪽 낙랑군
* 예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沃沮) 동쪽에 있던 낙랑국(樂浪國) (王 최리, 선조에 최숭)  

㉥ 대방의 위치를 분명히 하였다.
김유신 전과 개로왕 전과 『25사』와 일치되는 대방은 산서성 요(遼)의 동쪽에 있는 석문 근처로 되어 있다.


7) 삼국의 수도인 국내성 평양 한성 웅진 금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므로 사서와 일치되는 首都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평안도 평양은 32년4월 고구려의 낙랑국 병합 이후 고구려 별도 한성으로 503년까지 고구려직할지로 보여지고(420년 이후 支那族(漢部族) 국가의 연호(年號) 유물이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
高句麗 수도 평양은 용도 신성 고대인성 가까이에 있었다.

② 서울 석촌동 고분은 만주 高句麗 고분과 비슷하다.
서울을 백제의 한성이라고 하지만 사서와 일치하는 백제 수도 한성은 하수 숭산 대방 아차성 사성 및 하수의 제방이 있는 가까이 있었다.

③ 공주의 백제 사마왕 능이 있으나 익산 미륵사를 창건한 과부의 아들이며 자칭왕인 무강왕 백제로 미루어 왕이라 칭한 百濟의 총독부가 아닐까 (『일본서기』에는 태어나고 왕자로 있을 때도 즉위할 때도 사망할 때도 武寧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시호는 죽은 이후에 )
백제 웅진은 평원 황산 대산 동명 백강 주류성 항성 동성 잠산 덕안(德安)이 있는 곳에 있었다.

④ 경상도 경주는 5세기 이전 간(干)의 무덤과 503년 이후의 왕(王)능이 같이 존재하는 지역
(干, 韓, 汗은 고구려 지방지도자(地方指導者)로 기록하고 있다.)
* 금성은 8리의 성이 있어야 한다.


8) 동이(東夷)의 역사 기록을 수집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부분


㉠ 고려땅에서는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도 없었다. (김유신전)
㉡ 고려땅에서는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도 없었다.(김유신전)
㉢ "송"학자도 아는 선도산신(仙桃山神)의 동신성모상(東神聖母像)을 몰랐다.(신라본기)
㉣ 거칠부의 『국사(國史)』와 당(唐)영호징의 『신라국기(新羅國記)』(신라본기)
㉤ 김부식의 신라왕칭(新羅王稱)과 최치원의『제왕연대력』에서 호칭(신라본기)


9)『삼국사기』 편찬자는 김부식 혼자가 아닌 11명(삼국사기)

김부식의 사대사상은 『삼국사기』의 논, 찬에는 사대사상으로 보아질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대주의로만 몰아붙일 수 있는가 ?
지금 서양사상에 젖어 있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그들을 모두 사대주의자로 몰아붙이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사대주의자라 할 수가 있는가.


10) 『삼국사기』 개요


① 9세기 이전을 기록한 유일한 정사이다

동이족(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사중에서 고려 이전 역사를 알수 있는 것은 오직 『삼국사기』 뿐이다

②『삼국사기』는 남북한만의 역사기록이 아니다.

『三國史記』를 모두 남북한 지역의 역사 기록으로 알고 있지만 남북한만의 기록이 아니다.  
선비가 고구려의 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서울 한성과 연주 치청래주 항성( 州 淄靑萊州 項城)의 근처에 기자가 살던 땅과 진흥왕의 남북한 신라의 기록이 있으니 『三國史記』는 동이족의 동북아시아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③ 신라본기는 사로신라와 동신라 역사의 합본기(合本記)이다.

『三國史記』만이 두 신라가 동이족이었음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支那族(漢部族)의 기록에 의하여 사로신라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으며 진흥왕碑文에 의하여 동신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 만이 두 신라의 건국연대를 밝힐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
김부식의 두 신라 기록의 합본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천년 동안 支那族(漢部族)의 기록을 모두 삭제하였을 지도 모른다.
다행하게도 합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 흔적을 지금에 와서 되찾을 수가 있었다.
이는 기자가 살았던 그 시대 동이족(東夷族)이 하나 였음을 밝히는 자료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민족인 것이다.

④ 503년 이전은 하나의 사로신라였으나 이후에는 두개의 신라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와 『북사』가 아니었다면 두개의 신라의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을 것이나
신라본기의 기록은 2개의 신라가 시작됨을 각각 기록하고 있었다.
아무리 합본을 하였어도 일식 홍수 지명 특산물 조공일정 민속절 등 여러 상황에서 두개의 신라가 서로 다르게 시작됨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두개의 신라의 시작을
- 307년부터 신라라고 하는 사로신라와
- 고구려로부터 독립하는 503년으로 구분되어지게 되어 있음은 신라본기의 귀중함이었다.


⑤ 사서와 일치하는 百濟 수도 위치는 요의 동쪽에서 찾을수 있었다.

지금까지 百濟는 한국 서남쪽에 있었던 나라로 알고 있으나,
황해를 내해로 두 곳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百濟의 결정적인 자료는 百濟 수도 漢城과 웅진에 대한 충분한 기록이 있으니 유적을 찾을 수 있는 기록이며 모던 사서에서 공통부분이고 민족역사의 연속성도 함께 아주 명확하게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

우리역사에서 수도에 대하여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것은 오직 百濟 수도 뿐이며 그 기록은 우리 역사를 풀어 가는 최고의 열쇠인 것이다.
그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역사는 영원(永遠)히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두 곳에 있어도 수도 한성과 웅진은 황해 서쪽에서 찾을 수 있게 기록하고 있다.

⑥ 『삼국사기』는 낙랑왕국(樂浪王國)과 낙랑군(樂浪郡)을  분명히 구별하여 주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모든 학자들이 하나의 낙랑으로 봄으로서 해서 우리역사는 흔들리게 되었었다.  
분명히 동이족의 樂浪王國과 한의 낙랑군이 다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支那族(漢部族)의 기록에서 남북한 지역이 공백이 생길까 두려워했던 역사가 남북한 지역과 만주에 대한 해답이 바로 낙랑왕국이었고 高句麗의 남북한 진출 그리고 제3조선 영역이던 漢의 낙랑군 지역을 계승한 사로신라와 東夷族의  낙랑왕국을 계승한 東新羅 때문에 혼돈이 있었으나 이를 『삼국사기』는 분명히 구분하여 주고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⑦ 高句麗 百濟 사로신라의 시원지가 남북한 쪽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삼국사기』는 요(遼)의 동쪽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支那族(漢部族)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⑧ 高句麗가 高句麗本紀는 705년의 역사라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으나 내용 중 668년에 高句麗 900년 역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북부여 역사가 그대로 高句麗歷史임을 밝혀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라는 사로(사로; 사로; 사로; 계림<駟盧; 斯盧; 泗盧; 鷄林>)역사를 포함시켜 신라 역사로 기록하면서도 高句麗歷史를 줄인 것으로 보이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다행하게도 9백년의 기록은 북부여(北夫餘)가 고구려력사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북부여 해모수 기록이 있으니 우리는 9백년의 고구려력사를 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⑨ 『삼국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백제와 고구려 패망 지역이 남북한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의 기록이다

어느 곳에도 남북한에서 패망한 기록이 없다.
오직 기자(箕子)가 살던 지역의 사로신라에서 였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패망 기록을 수서 구당서 당서(隋書 舊唐書 唐書)를 인용한 것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로신라에서 기록된 것이 없고 스스로 기록하지 못한 마당에 장안 중심의 기록을 인용(引用)해도 내용이 같으니 그 위치를 분명히 찾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⑩ 사로신라 존재가 지명뿐 아니라 문화유산(文化遺産)의 기록도 있다는 점이다.

나침반(羅針盤), 나전칠기(羅鈿漆器) 쇠뇌(弩) 포(砲) 비단(錦) 등이 기록은 사로신라의 존재를 더욱 분명하게 하여 주고 있다.

⑩ 『삼국사기』는 동북 아세아가  동이족(東夷族)의 무대임을 기록하고 있다.

- 산서성 요의 동쪽 사로신라와 당과의 경계 지명은 석문 석성 항성(項城) 덕안이었고
- 당과 백제의 경계는 동명 덕안 서쪽이었고,
- 당과 고구려의 경계 지역은 요(遼)의 동쪽 태행산맥이었다.
- 고구려와 동 신라와  경계선은 高句麗長城이었다.
- 사로신라의 중심 강은 회수(淮水)이며
- 백제의 중심 강은 하수(河水)이며
- 고구려의 중심 강은 백하(白河 : 난하)다.
- 동 신라의 중심 강은 낙동강이었다.


11) 『삼국사기』의 시대별 구분

① 서기전(西紀前) -- 북부여(고리 : 高句麗), 낙랑국, 제2조선, 삼한, 왜  
② 31년까지 -- 낙랑왕국,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왜
③ 502년까지 -- 고구려, 백제, 사로신라, 왜, 가라
④ 668년까지 -- 고구려, 백제, 진출백제, 사로신라 동신라, 왜
⑤ 669년 이후 -- 사로신라, 동신라, 발해, 일본
⑥ 9세기 -- 사로신라, 동신라, 후고구려, 후백제

이것이 『삼국사기』의 내용에서 우리민족(東夷族)의 국가이다

사로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기록은 『당서』이전의 지나족(한부족)의 기록에서 입증하여 준다.


12) 『삼국사기』의 위대성 (아시아가 모두 우리민족 강역이라 하였다.)


① 선비의 땅은 고구려이다.
지금까지 우리 민족과는 무관하게 가르쳐 왔으나 고구려의 부족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유리왕11년)
② 북옥저 동옥저 옥저(西沃沮) 남옥저 모두 고구려의 땅이다
③ 양맥(梁貊)도 고구려의 땅이다.
④ 한(漢)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합병하였다.
⑤ 한의 낙랑군과 조선의 낙랑왕국을 분명히 하였고 모두 병합한 기록이 있다.
⑥ 사로신라(西新羅)와 동신라(東新羅)의 기록이 있다.
⑦ 백제(百濟) 수도 한성(漢城)의 유적에 관한 기록이 있다.
⑧ 초기 신라의 위치가 낙랑대방의 땅에 초기 백제의 위치가 낙랑태수의 땅에 있다는 사실도 중요(重要)한 것이다.
⑨ 『삼국사기』의 가장 위대한 것은 동이(東夷)족의 무대가 요의 동쪽(遼東; 동경113도 50분)에 있으며 진 장성(秦長城)의 북쪽 또한 東夷족이라는 사실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13) 『삼국사기』의 장단점


< 장점 >

㉠ BC2世紀부터 AD9세기까지 동이족이 남긴 유일한 정사이다.
㉡ 동북아시아가 동이족의 무대임을 나타내는 유일한 정사이다.
㉢ 선비 북옥저 동옥저 낙랑왕국의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 낙랑왕국과 낙랑군을 분명히 하고 있다.
㉤ 지명뿐만 아니라 문화의 기록이 있음이다


< 단점 >

㉠ 두신라를 구분하여 기록하지 못한 점
㉡ 두 곳의 백제를 정리하지 못한 점
㉢ 남북한 상황으로 착각한 점
㉣ 모송주의 사상으로 표현된 곳이 있는 점


< 김부식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

㉠ 고려강역의 현장에서 옛 기록을 보았으며 모송사상과 고려국가사관에 의하여 기록을 하였고
㉡ 사로신라와 동신라를 하나의 신라로 기술하였다는 것은 착각을 하였을까?
㉢ 수도가 있는 백제와 동백제를 하나로 보았으니 하나로 기록한 점
㉣ 고려시대 遼東과 고려시대 이전의 遼東 遼西를 구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요나라 이후와 이전을 혼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4) 『삼국사기』를 부정하는 이유

① 新羅가 하나로 한반도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② 百濟 수도와 일치되는 지역이 남북한 지역으로 보여지지 않는 점
③ 高句麗 百濟 신라 기록이 남북한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점
④ 근세조선 국가사관(반도사관)과 사대주의에 의하여 쓰여졌다는 선입관으로 현재 남북한의 현장과 맞지 않는다는 이 理由였다


15) 『삼국사기』로 되었던 행운은 ?


① 지나족(한부족)의 사서에서 공통부분의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25사』에서 동이 역사 기록의 완전 말살을 방지하였다는 점
② 東夷족의 문화를 기록했으니 東夷족의 역사를 정립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③ 호태왕비문에서 신라 백제 왜 가라 임나의 위치를 밝힐 수 있다는 점 등 3가지가 가장 큰 행운(幸運)으로 보아야 한다.

< 결  론 >

족보가 있고『25史』『호태왕비』『진흥왕비』가 있는 한 『삼국사기』는 부정할 수 없으며
믿고 정리 할 수밖에 없고,
서화(西華) 항성(하남성)에서 경주까지 하나의 민족으로 정립해야 할 것이다.

출처 : 행복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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