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영광을

[스크랩] 징기스칸의 혈통은 발해의 말갈족!! 징기스칸의 서역 정벌과 고려의 관계!!

정우산기 2008. 4. 22. 12:36

 

 징기스칸의 혈통은 발해의 말갈족!!

징기스칸의 서역 정벌과 고려의 관계!!

 

 

 

태무진과 훌란 공주의 몸에도 솔롱 고스의 혈맥이 뛴다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은 물과 목초가 풍부한 곳이다.

동명성왕으로 추정되는 고올리 칸,

칭기즈칸과 발해 공주 이야기 등의 무대이기도 한다. <김문석 기자>

 

 

오늘은 몽골에서 5번째 맞이하는 '설날'이다.

아침에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새배를 올린 다음

산소에 다녀오고 친척들과 이웃을 방문하며

서로 새 해의 다복과 건강을 빌어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내던 한국생활과

몽골의 설날인 '차강사르'의 풍습이 별로 다를게 없는 것은

한국과 몽골이 그 만큼 정서적으로 가깝기 때문일게다.

다만 한국에서는 떡국을 먹지만 이곳에서는

'보쯔'라고 하는 고기만두를 많이 먹는다.

 

 

 

특히 보쯔를 많이 먹으면 그 만큼 복을 받는다 하여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양고기와 보쯔와 수태차, 그리고 보드카와 아이락으로 채워지는

차강사르의 음식상 차림... 마을의 가장 높은 '어워'에 올라가

새 해 일출을 바라보며 한 해의 복을 기원하며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른께

새배와 새뱃돈을 드리고 (몽골에서는 새뱃 돈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린다.)

가까운 친척과 이웃을 방문하는 차강사르의 하루...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독한 보드카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흔히 볼 수 있으며

경제사정이 어려운데도 이 날 만큼은 풍족하게 보내려는 이들은

한국의 7~80년대의 모습과 어찌도 닮아 있는지...

잃어버린 한국의 옛 정서를 이곳 몽골에서 찾았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이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 할 준비를 해야한다.

몽골의 봄은 차강사르와 같이 오기 때문이다.

올 해는 농사일과 이곳의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일로 많이 바쁠 것 같다.

 

 

 

몽골은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물론 지리적으로나 생김새로 보면 아시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들의 사고방식에는 유럽방식이 상당히 많다.

남녀의 사랑표현이나 사업을 할 때 비즈니스의 마인드도 그렇고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도 그런 성향이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동양적인 마인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전통 관습은 우리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이다.

어른을 섬기고 예의를 중시하며 남녀 구분도 엄할 때가 많다.

 

 

 

우리는 몽골에 오며 몽골을 바라 볼 때

이들의 역사에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과거 칭기스칸의 영광의 역사가 아니라 고난과 피탈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알아야 지금의 이들을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청나라에 의한 220년, 러시아에 70년... 그 동안 이들의 정체성은

심각한 훼손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양고비 가는 중간 중간 펼쳐지는 초원... 소나기가 다가오고 있다.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현재 몽골이며 혼란과 피곤함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아시아이면서 유럽의 마인드를 동시에 갖고 사는 몽골사람들...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많이 잃어버린 비극적인 역사를 안고 사는 이들이

그래도 희망적인 건 늘 생각의 유연성과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새로운 도약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

 

 

 

몽골에는 늑대가 많다. 북부지역의 숲속은 말 할 것도 없고

나무 한 그루 없는 초원과 척박한 땅 고비에도

늑대는 존재하며 가축과 유목민을 위협한다.

몽골사람들은 늑대를 좋아한다.

몽골사람들의 탄생설화에 푸른늑대가 등장하며 초원길을 가다가

늑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이다.

이런 사람들이 늑대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사냥을 나가서 늑대를 잡으면 그 개인과 주변사람들에게는 이만저만한 경사가 아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냥갔던 차량에 늑대를 싣고 시가행진을 할 정도이니...

또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한 번이라도 만저 보고 싶어한다.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기에... 유목민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경애의 대상인 몽골의 늑대. 늑대를 경애하면서도

사냥을 즐기는 몽골사람들. 이 두가지 모순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몽골을 보다 많이 알 수 있지 않을까?

 

 

 

푸른 군대, 푸른 늑대의 후손...

몽골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표현한다.

옛날 바이칼 호수의 북쪽에서 푸른 늑대가 호수를 건너와

호수의 남쪽에 살던 하얀사슴을 만나

자식을 낳고 부족을 이루니.... 몽골의 탄생설화이다.

그래서 그럴까 과거 징기스칸 시절의 남자들은

용맹하였고 여자들은 순종하며 가정을 꾸렸다.

푸른 늑대의 용맹함은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패하는 힘을 과시하였고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변 나라의 사람들은 그 용맹함이 많이 두려웠었나 보다.

청나라는 푸른 늑대의 야수성을 순치시키기 위해

라마불교를 이용하였고 러시아는 철저한 우민화 교육과

혈통정책을 통해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살아 남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징기스칸을 통해

푸른 늑대는 부활하려고 하고 있다.

 

 

 


 
위의 지도를 보면 내몽골자치주를 보라색의 선으로 표시해놨습니다.
몽골은 러시아의 일원이고 내몽골자치주는 중국의 영토입니다.
그 둘을 합쳐서 보면 얼마나 넓은 영토인지 가늠하실수있을 겁니다.

 

 

 

몽골은 지금 온통 징기스칸으로 가득하다.

오직 한가지 키워드, 징기스칸이다.

징기스칸의 몽골 건국 800주년을 맞이한

올 해(1996년)를 기해 가히 징기스칸의 폭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하라호름의 옛 성의 모습으로 호텔을 만들었는데... 입장료만 1000투그릭이다.

 

 

7월 21일 오후 4시께 에벵키 민족박물관에서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졌다.

나로서는 17년 여를 애타게 찾던 ‘솔론’이라는 족제비과 짐승의

박제된 실물을 처음 보는 것이라 단연 특종감이었다.

역시 오랫동안 이를 찾아 헤매온 현지인 성빈(成斌·70) 선생의 수고 덕분이었다.

 

 

 

그간 서울대 이항 동물유전자은행장과

흑룡강성 동물자원연구소 박인주 교수(62)의 탐문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

한갓 박제된 동물 하나에 이렇게 매달린 것은 ‘조선’이 아침의 나라라는

전거도 전혀 없는 허황된 해석과 맞먹는, ‘솔롱고스’가 무지개의 나라라는

한국인의 그릇된 지식을 바로잡을 아주 긴요한 실물 자료이기 때문이다.

몽골학의 거장 펠리오가 맨 먼저이를 문제로 제기했다.

‘솔롱고스’는 ‘솔롱고’의 복수로, 솔론을 잡아

모피(Fur) 시장에 팔아서 먹고사는 부족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몽골비사’에도 이런 식으로 부족의 이름을 붙이는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칭기즈칸 ‘출생의 비밀’ 담긴 어원


에벵키 민족박물관에 전시된 솔롱고스 박제. 한국인의 원류와 한·몽 관계의 그릇된 지식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긴요한 실물 자료다. <김문석 기자>

솔론은 누렁 족제비다. Baraga(바라가)가 Bar(호랑이)라는 명사에

 ‘aga’가 붙어 ‘호랑이를 가진’이 되듯이, Solongo (솔롱고) 또한

 Solon(솔롱)이라는 명사에 ‘go’가 붙어 ‘누런 족제비를 가진’이 된다.

Solongo에 ‘s’가 붙어 복수가 되면 부족 이름도 된다.

훌룬부이르 몽골 초원 원주민들은

애호(艾虎)나 황서랑(黃鼠狼)이라고도 부른다.

 

 

 

보통 정도로 가늘고 긴 족제비과 동물로 서식권역이 매우 넓어서

각종 생태 환경에 모두 적응 능력이 있다.

삼림, 초원(스텝), 하곡(河谷), 소택(沼澤)이나 농작물 생산지와

백성들이 사는 지대에서도 혈거(穴居)한다. 새벽이나 황혼녘에 먹이를 찾아 활동한다.

주된 먹이는 설치류 동물, 개구리류나 새의 알과 병아리 등이다.

내몽골 중동부 및 동북의 대부분 지역, 한국, 몽골과 시베리아 일대에 분포돼 있다.

 

 

 

 

몽골에서 한국인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연원은

칭기즈칸의 ‘출생의 비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이 바이칼 호로 흘러드는 셀렝게 강 일대에 자리 잡은

메르키드족 가운데 우두이드 메르키드 톡토아베키의 아우인

예케 칠레두가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난다.

약탈자는 칭기즈칸의 호적상의 아버지 예수게이이고,

약탈당한 여인은 칭기즈칸-테무진의 어머니 후엘룬이다.

 

 

 

멍근 머리트와 만치루 사원, 징기스 후레 등입니다.


 

그는 물이 대흥안령 북서부 부이르 호수로 흘러드는

황하 강 지역의 처가에서 데릴사위로 있다가

그들의 관행에 따라 임신한 아내 후엘룬의 출산을 위해

고향으로 함께 귀가하던 길에 오논 강변에서 아내를 빼앗긴 것이다.

이 때문에 테무진의 생부는 예수게이가 아니라

예케 칠레두라는 것이 비공식적으로는 거의 공인된다.

 

 

 


해 뜨기 전 톨강에 피어나는 물안개...

 

 

 

칭기즈칸이 몽골 혈통이 아니고 메르키드 핏줄이라는 얘기다.

다구르족 몽골학자 아르다잡 교수는

메르키드는 발해의 말갈(靺鞨)이라고 고증한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의 혈통적 소속은

발해 유민국, 곧 당시의 솔롱고스가 된다.

그런데 당시의 몽골 고원에서는

아내를 빼앗기면 반드시 보복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래서 20여 년 후에 예수게이의 호적상 아들 테무진도 20대에

예케 칠레두의 아우 칠게르 부쿠에게 아내 보르테를 뺏긴다.

당시에 약체였던 칭기즈칸은 맹렬하고도 노회한 외교로

부족들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자신의 친아버지가 되는

예케 칠레두의 혈족 메르키드를 섬멸시키고 뺏긴 아내를 되찾는다.

그렇게 되돌아와서 낳은 아들이 장자 주치다.

 

 

 

몽골 역사상 전설적 미인 훌란 공주

 

한·몽 관계사의 첫 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헤름투. 칭기즈칸과 발해 유민국의 훌란 공주가 총야를 지낸 이곳에 지금은 붉은 버드나무로 만든 오보(서낭당)가 서 있다 <최낙민 제공>

‘주치’란 손님이란 뜻으로 아내 자궁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치는 칭기즈칸의 장자로 관행상 칸 위의 승계자임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이 ‘메르키드의 사생아’라는 치명적인 저주를 퍼붓는 가운데 소외되고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계승자로 선택된다. 칭기즈칸 생전의 일이다.

칭기즈칸과 그는 호적상으로는 부자 간이지만 혈통상으로는 종형제 사이다.

 

 

 

‘몽골비사’의 관계 내용들을 간추려본 것이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반렵반목의 메르키드 혈통과 단절하기 위해 그 피가 흐르는 주치와

훌란 카툰의 아들마저도 철저히 소외시켰다. 애초부터 아예 멸족을 감행하며

제 혈통의 완벽한 부정을 통해 스텝의 온전한 순수 몽골 혈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일생을 오로지 끝없는 정복으로만 일관해야 했다.

이런 시각에서 예리하게 칭기즈칸의 일생을 천착(穿鑿)해낸 몽골 영웅 일대기가

일본의 역사소설가 이노우에 야스이(井上靖)의 불후의 창작품 ‘푸른 이리’다.

 

 

 

테를지 바위산 위로 뭉게구름이 하얗게 피었다.

 

 

 

메르키드를 섬멸한 후 칭기즈칸도 메르키드족의 아내와 딸들을 차지했다.

더러는 딸은 자기가 갖고 어미는 아들에게 주기도 했다.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딸인 훌란 공주도 헌납됐다.

훌란 공주는 몽골사상 전설적인 미인으로 알려지고 있어

원말의 기황후와 함께 한국 여인은 아름답다는 인상을

몽골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킨 솔롱고스, 즉 고려 여인이다.

 

 

 

 몽골의 낙타는 혹이 두개랍니다.^^
 

당시의 솔롱고스는 발해 유민국이었고

발해는 외교문서 상에 고려로도 자칭했다.

알려진 대로 훌란 공주는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에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솔롱고스가 발해이고

메르키드가 솔롱고스로 기록됐다면,

메르키드는 말갈일 수 있고 메르키드의 공주 훌란은 솔롱고스 공주가 된다.

 

 

 


천국으로 가는 통로가 있을까? 가도가도 끝이 없는 몽골의 길위에서 잠시 휴식을 한다.

 

 

 

‘알탄톱치’는 놀랍게도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다.

보카이(Booqai)의 보카란

‘늑대’의 존칭어로 몽골에서 발해를 일컫는다.

차간은 ‘하얀’의 뜻으로 젖색을 상징하는 귀족 색깔이다.

즉 발해(渤海) 백왕(白王)이 되는 것이다.

결국 훌란 공주는 발해(유민국) 공주이고,

그래서 솔롱고스(한국) 공주라고 썼음이 자명하다.

 

 

 

몽골인에게 메르키드-말갈은 타이가에서 활을 쏘아 사냥하고

전투하며 사는 숲속의 사람들이다.

메르겐(麻立干: Mergen)이라는 명궁수의 복수형에서 유래된

부족명으로 이족(夷族)이랄 수도 있다.

따라서 메르키드는 흥안령 북부나 스텝과 타이가가 혼재하는

셀렝게 강 일대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발해와 역사적으로 밀착 관계를 맺어왔을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발해의 고급 문명을 체득하고 철의 주산지인

셀렝게 강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강력한 무력을 과시했다.

더군다나 이 지대는 솔롱고스 부족의 원주지로 알려진 곳이 아닌가.

솔론족은 바이칼 호 동쪽에서 헨티 산맥에 걸치는 지역을 원주지로 하면서

초원의 주변으로 동진하기도 하고 초기에는 주로 셀렝게 강을 타고 서진한 것으로 보인다.

훌란은 셀렝게 강과 오르홍 강의 합류지점에 살던 우와스 메르키드 다이르 우순 칸의 공주다.

 

 

 


얼어버린 강이 길이되는 곳...

 

 

 

근하지역은 북부여를 세운 고리국 터


몽골 도로노드 아이막 할힝골 솜온 숑크 타반 톨로고이에 있는 석인상. 현지 원주민들이 '순록치기 임금'이라는 뜻인 '고올리칸 훈촐로'로 부르는 이 석인상을 수미야바아트르 교수는 동명성왕으로 비정하고 있다. <도브도이 바야르 교수 제공>

 

 

‘알탄톱치’에서는 칭기즈칸의 본거지인 헨티 산맥 일대에서 이들을 공격하면서

‘해뜨는 쪽’의 메르키드를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쪽인데 동쪽을 쳤다고 해서 이를 오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해 뜨는 쪽’이라는 관용구는,

코리족 시조 탄생 전설이 얽힌 바이칼호 알혼 섬이

이 지역 몽골로이드들의 주신을 모시는 중심지여서 그냥 따라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솔롱고스의 메르키드 부족이

헨티 산맥의 서쪽 셀렝게 강 일대에 있든

동쪽인 훌룬부이르 초원 근하(根河) 일대에 있든

그대로 ‘해뜨는’,

즉 ‘동명(東明)’이라는 형용구가 따라붙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솔론-솔롱고스의 본거지는 애초에 물이 북극해로 흘러드는

바이칼 호-셀렝게 강 일대에 주로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21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교과서에 솔롱고스라고 찍어내기 전에는,

물이 태평양으로 흘러드는 훌룬부이르 호 대만주권에서는

한국을 ‘고올리’라고만 불렀지 솔롱고스라는 호칭은 전혀 몰랐다.

7월 23일에 탐사단원들은 근하에 들어섰다.

 

 

 

영하 40~50℃까지도 내려가 호랑이가 못 사는, 대흥안령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근하는 ‘껀허‘로 발음되는데, ‘껀’은 물이 ‘깊다’는 군(gu:n)이 아니라

빛이 ‘밝아오다’나 물이 ‘맑아지다’라는 뜻의 게겐(gegen)이라고,

구몽문(舊蒙文)인 내려 쓴 꼬부랑 글씨로 적힌 위구르친

비칙 현지 팻말을 보고 에르덴 바타르 교수가 지적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르 가라크’-‘해 뜨는’이라고 하여, 솔롱고스라는 국명이나

종족명 앞에 으레 따라붙는 수식구와 동일한 내용의 이름이어서다.

나는 이미 이 지역을 동명왕이 말치기 노릇을 하다가 도망 나와

동남하해서 북부여를 세운 고리(槁離: Qori=순록)국 터로 추정해본 터여서 더욱 그랬다.

껀허의 ‘껀(根)’이 ‘동명(東明)’의 뜻을 가지리라고 이전에는 미처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바이칼 동남쪽이 원주지였던 솔롱고스 부족에 붙어내린 관용구에서 비롯된 이름일 터다.

 

 

 

수미야 바아타르 교수가

1990년 5월에 몽골 문화사절단 통역으로 따라와

내게 건네준 첫마디가 부이르호 남쪽 호반에 선 고올리 칸 석인상이

바로 ‘솔롱고스’ 임금인 ‘동명’ 성왕이라는 것이다.

이는 필자를 경악케 했다. 몽골 스텝엔 발도 들여놓아본 적이 없는

농경권 붙박이인 당시의 내게는 기마 양 유목민의 거리 개념이 있을 턱이 없어서다.

 

 

 

실로 이때까지 필자는 바이칼 동남부 셀렝게 강변의 메르키드 공주 훌란이

훌룬부이르 몽골 스텝의 하일라르 강변에서 칭기즈칸에게 헌상되고

헤름투라는 곳에서 초야를 보냈다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너무나도 먼 거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농경적 거리 관념에만

매몰되었기 때문임을 유목 현지 답사 경력을 쌓아가며 점차로 깨달았다.

 

 

 

 

훌란 공주가 나이도 다른 아내들보다 어려 앳되고 아름다웠겠지만,

필시 고국 또는 고향의 동족이어서 칭기즈칸이 그토록 그녀를

사랑해 전장에까지 늘 함께 간 것 같다.

1990년 초에 몽골에 살면서 나는 몽골 소녀들을 많이 만났다.

그녀들은 저마다 자기가 한국 여자를 닮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너는 많이 닮고

너는 조금 닮고 넌 아주 안 닮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몇 번인가 그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그녀들의 표정이 저마다 서로 달라지는 것을 알았다.

 

 

 

 

 


 

 


 

 


 

 



여름이면 몽골의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야생화들...

 

 

 

한국 여인을 닮았다는 게 아름답다는 말이 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훌란 공주의 전설적인 미모를 떠올렸음이리라. 많아 닮았다는 말을 들은 소녀는

나를 대하는 눈빛이 금방 달라지며 반색했다.

지금 우리가 만나온 이곳의 바르쿠족 몽골 처녀들도 그랬다.

<주채혁 : 세종대 역사학과 교수·몽골사>

 


 

  

징기스칸의 서역 정벌과 고려의 관계

http://cafe.daum.net/chosunsa/POZj/798주소 복사
 
 
 

징기스칸 노래는 웅장한 맛이 난다.
그 징기스칸 때문에 황화론(黃禍論)이란 Yellow Peril이란 말까지

유럽 사람들이 19세기말에 지어내어 아시아를 완전 분렬시켰다.
그 징기스칸이 세계를 지배했다면서

1211년에 북경을 지나고, 중도(中都)를 지나 남경성으로 들어갔다.

 



(1) 그 징기스칸이 "통곤[潼關] 관문으로 향하였다.[유원수 역주,『몽골비사[元朝秘史]』(사계절, 2004), p. 256]

이 사료를 보면, 징기스칸이 1206년에 나라를 세우고 사방의 정벌을 감행하여 나섰던 곳이 남쪽의 "동관(潼關)"이다.


우리는 이 "동관"이 섬서성 장안 동쪽에 있는 "함곡관"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정말 징기스칸이 그곳까지 진격해 나갔는가?

(2) 종성도호부의 북쪽 1리에 동관(潼關) 소천(小川)이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도호부의 북쪽 9리에 북봉봉수(北峰烽燧)가 있는데, 남쪽은 남산, 북쪽은 동관진(潼關鎭)에 호응한다.

 

[『신증 동국여지승람』권50 종성도호부]

 



이 사료는 우리들이 많이 알고 있는 조선의 지리서『신증 동국여지승람』에

함경도 종성도호부에 나온 것인데, 거기에 "동관(潼關)"이 있다.

이 동관은 중국대륙의 요즘 지리에 나온 섬서성 동관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징기스칸은 오히려 섬서성 "동관"으로 진격해간 것이 아니라,

조선의 함경도 종성도호부 "동관"에 진격해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함경도 종성도호부 동관은 어디에 있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동관"의 "소천"이 서쪽으로 흘러 두만강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두만강은 동쪽으로 흐르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동관소천이 서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보아

두만강도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당연한 리치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좀더 깊이 여러 지명과 관련하여 볼 것은

경흥·경원·종성·온성·회녕·부녕 도호부가 한결같이

"아무하[阿木河/阿毋河/阿姆河/斡木河/吾音會/Amu dar'ya]"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 종성도호부는 바로 아무하 유역에 있는 고을이라는 말이며,

바로 그곳에 동관소천이 서쪽으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이 아무하는 파미르고원에서 서쪽으로 흘러 아랄해로 들어가며,

그 중간 지대는 옥야천리, 옥야만리되는 옛날의 옥저가 있었고,

지금은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이 들어서 있다.

 

 



우리는 "아무하"를 "아무 다르여"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아무하"가 조선의 함경도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두만강만 알았고, 그 유역에 경흥·경원·온성·종성·회녕·부녕 도호부가 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것이 "아무하" 유역이라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고,

또 그 두만강 그 어디에도 "아무하"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으니,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 가버렸다.
그런데『신증 동국여지승람』권50에 보면, 위의 여러 도호부들이 나란히 있는데,

그 공통점이 "아무하(阿木河·斡木河)" 유역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아무하"가 중앙아시아에 있는 "아무 다르여(Amu Dar'ya)", 즉 "아무 무렌(Amu muren)"인 것이다.
좀은 지루하겠지만, 몽골의 력사를 한번 알아보자. 유원수 역주,『몽골비사』(사계절, 2004)에 있는 내용이다.

 

 



(1) 1219년(토끼해)에 잘랄딩 술탄(Jalal-ding Soltan)과 칸 멜릭(Qan-Melig)이

시기 쿠투투(Sigi-qutuqu)를 제압하고, 징기스칸(Cinggis qahan)에게까지 압박해올 때,

제베(Jebe)·수테에테이(Sute'etei)·토코차르(Toqucar)가

잘랄딩 술탄과 칸 멜릭의 뒤에서 들어와 다시 그들을 제압하여 도륙하였다.

부카르(Buqar: 부하라, 북위 40도 동경 61.5도)·세미스갑(Semisqab: 사마르칸트)·

오다라르(Udarar: 오트라르, 북위 41.5도 동경 69도) 성에서

그들이 합류치 못하도록 제압하면서 신 무렌(Sin muren: 인더스 강)까지 추격해가자,

그들이 신 무렌으로 풍덩 뛰어들어 많은 사르타울(Sarta'ul) 사람을 거기 신 무렌에서 섬멸하였다.

 

 

 

 

잘랄딩 술탄과 칸 멜릭은 자기네 목숨만 부지한 채, 신 무렌을 거슬러 도망쳤다.

징기스칸은 신 무렌을 거슬러서 바드크센(Badkesen: 바닥샨, 북위 38도 동경 71도)을 약탈하고,

나아가 에케(Eke) 개울과 게운(Ge'un) 개울에 이르러, 바로안(Baru'an: 파르완) 초원에서 야영하였다.

잘랄딩 술탄과 칸 멜릭을 추격하도록 잘라이르족(Jalayrtai)의 발라(Bala)를 보냈다.

제베와 수베에테이를 매우 칭찬하면서, "제베, 그대는 지르고아다이(Jirgo'adai)라는 이름이었다.

타이치오드(Tayicu'ud)로부터 와서 제베가 되었다."고 (추억을) 말했다.

토고차르는 "칸 맬릭의 변경 도시들을 마음대로 약탈하여 칸 멜릭이 이반하게 했다.

법을 삼아 참수하자!"고 정하였다가, 다시 참수만은 면하도록 한 뒤, 몹시 꾸짖고, 벌로 군대의 지휘권을 박탈하였다.

 

 



그러게 하여 징기스칸이 바롤라(Barula: 파르완) 초우에서 돌아와 조치(Joci)·

차아다이(Casdai)·우구데이(Ogodei) 세 아들에게 우익 군사를 주면서

"아무이 무렌(Amui muren: 아무 다르여)을 건너

우룽게치(Urunggeci: 우르겐치, 아랄해 남쪽 북위 42도 동경 59.5도) 성을 설치하라."고 해서 보냈다.

톨루이(Tolui)를 이로(Iru: 헤라트)·이네부르(Isebur: 니샤푸르, 북위 36도 동경 55도)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설영하라!"고 해서 보냈다. 징기스칸 자신은 오디라르(Udirar: 오트라르) 성에 설영했다.[위의 책, pp. 270∼271]
여기 징기스칸의 력사에서 다른 내용을 볼 것 없이 그 지명이 "아무 무렌", 즉 아무 다르여가 있다.

물론 중앙아시아의 서부지역이며, 이 강의 북쪽에 시르 다르여(Syr Dar'ya)가 있다.
이 지역의 전쟁사가 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고려사』세가22 고종1을 보자.

 

 



(2) 1219년(기묘6) 가을 7월에 북계 흥화도(興化道)의 모든 백성들을 검열했다. …

이 때에 간첩의 입에서 '몽고 사람들이 가을철에 다시 온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8월 임진일에 동북면 병마사가 보고하기를, '몽고와 동진국(東眞國)이 군사를 보내어

진명성(鎭溟城) 밖에 주둔시키면서 공납을 독촉한다.'고 하였다.
9월 신축일에 몽고 사절 1명과 동진국 사람 9명이 우리나라에 왔다.


 

 


이『고려사』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해 1219년인데,

일단 몽고 군사와 동진국(함경도 지역) 사람들이 고려에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몽고 징기스칸의 전투와 무슨 상관일까?
이 때는 몽고의 징기스칸과 그 일당들이 서역지방 정벌에 나섰던 시기(1218∼1224)이다.
그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 전쟁으로 나섰는데,

나머지 몇몇 몽고 군사들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요구했을까? 군사적 위협은 없었을까?

그 간첩의 말이 이미 위협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몽고군들의 군사적 이동이 고려와 무슨 관계가 있으까?

 

 



(3) 1218년(무인5) 8월 계미일에 글안(키타이)군이 양주(楊州)를 침략하고,

기사일에 서해도 방수군(防戍軍)이 곡주(谷州)에서 글안군과 교전하여 적 300명 남짓의 머리를 베었다.
12월 1일(기해)에 몽고 원수들이 합진(哈眞)과 찰라(札剌)가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동진(東眞) 포선만노(蒲鮮萬奴)가 보낸 왕안자면의 군사 2만 명과 합세하여 글안 적을 치겠다고 선언하고,

화주(和州)·맹주(猛州)·순주(順州)·덕주(德州) 네 성을 쳐서 깨뜨린 다음 곧장 강동성(江東城)으로 향하였다.
1220년(경신7) 3월 병오일에 글안군이 평로진(平虜鎭)에 침입하였다.

 

 

 



이 자료는 징기스칸이 서역을 공격한

1219년의 1년전과 1년후의『고려사』고종 때의 기록이다.

그런데 바로 그 1년전에 글안군이 쳐들어와서 전투를 했고,

1년 후에도 글안군이 쳐들어 왔다.
자! 글안이 우리는 동경 120도 선상의 료녕성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

그것은 고려를 한반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한 작품이다.

그러나 글안(契丹: 거란)은 키타이(Kitai/Kitan)이며,

이들은 흑해·카스피해의 북쪽 지역에 있는 부족들이다.
이들이 고려에 침입해왔다는 말은 그 고려가 결코 한반도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글안군이 고려에 쳐들어왔다면

그 북쪽에 있는 몽고는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영역을 지나 밟고 가는데 말이다. 이상한 력사이다.
위의 (3)에서 보면, 1218년에 몽고군이 동진국 군사와 합하여

3만명이 글안군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몽고군과 글안군과의 대결이다.

그 몽고군들은 이전부터 달단이나 타타르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있는 곳은 투란 지역이고 우랄과 알타이산의 어름,

아랄해와 발하슈호의 북쪽에 있었다.

 

 

 

 


그렇다면 위의 (1)에서 1219년의 징기스칸의 서역공정은

위의 (3)의 1218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전투인 것이다.
그리고 몽고군이 "화주(和州)·맹주(猛州)·순주(順州)·덕주(德州)"를 깨뜨렸다는 말은

그 몽고군사들이 고려 땅에 있다는 말인데, 그 지명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한반도?
"화주(和州)"는 영흥(永興)도호부가 있었던 곳이고, 함주(咸州)인데,

이곳은『중국력사지도집』(제6책, p. 73-74)에 보면,

토로번(吐魯番: 북위 43도 동경 90도)이다. 나머지 지명들은 앞으로 더 찾아봐야 할 것이다.

 

 

 


몽고군들이 그 고려 땅에서 1218년에 했던 행위들은

1219년에 아무 다르여를 건넌 징기스칸의 몽고군의 행동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징기스칸이 서하(西夏)지역, 즉 페르시아전역의 전투에 나섰던 때가

바로안(카불에서 1시간 거리), 즉 파르완 전투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하였는데,

몽고군들에게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는 정세이고,

고려도 마찬가지의 터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1219년 9월에 겨우 몽고사절 11명이나 왔다는 내용은 거짓이라기보다,

그들의 군사적 행동을 고려황제 고종에게

보고하러 왔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더구나 징기스칸의 군대들이 서역을 정벌을 1225년에 끝내고

고려를 공격했다는 시기가 1231년인데, 그러면 겨우 6년만의 공격이다.
징기스칸의 주력이 중앙아시아에 집중해 있었고,

거기서 줄곧 갈등과 충돌의 연장에 있었는데,

2만리나 되는 한반도까지 정말 왔을까? 무엇을 얻기 위하여?

전략적 어떤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선가?

군사의 행동은 전략적 가치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몽골[元]의 고려 침략에 대하여

http://cafe.daum.net/chosunsa/POZj/639주소 복사

 

 


몽골 군대가 고려에 침략했는데, 그것도 30년 이상이나 끌었으며,

항복하고서도 10년을 더 끌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게다가 몽골군대는 칭기스칸 때부터 중앙아시아로 진격해나갔다.
전쟁에서 집중과 분산의 원칙에서 보면, 병력의 집중에서 완전히 모순된다.

또 전략적 운용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서 시야를 넓혀서 중앙아시아로 돌려보자.

몽골군이 어떤 목적과 어떤 방향으로 군사력을 집중했는지를 말이다.

 

 



(1) 몽골(Mongol)의 제4군은 고려를 복속시키기 위하여 진격하였다.

1231년 12월 오늘날의 서울 서북쪽인 고려의 수도 개성(Kaesong)이 몽골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들은 고려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이를 다스릴 72명의 다루가치(darughachi)를 두었으나,

1232년 7월 이 몽골 주재관들은 서울 서쪽의 작은 섬(little island) 강화(Kangwha)로 피난한

고려왕 고종(Ko-tjong)의 명령으로 모두 살해되었다.

우구데이[太宗]가 1236년 고려―적어도 고려본토―를 실질적으로 점령하였다.

고려조정은 항복을 선언하였으나(고려는 1241년 이후 종속국임을 인정하기 위하여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 섬(its island)에 30년을 더 틀어박혀 있었다.

[르네 그루쎄 지음, 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 2002 6쇄), p.376]



이 자료를 보면, 몽고군은 1231.12∼1236년까지 적극적으로 고려를 공격하였으며,

그 뒤로 1361년까지 고려조정이 강화도(江華島)에 틀어박혀 있는 것으로 된다.
여기서 고려를 침공한 군대가 제4군이라고 했으니, 제1·2·3군도 있다는 말이다.

 

 



(2) 몽골군은 3군으로 나뉘어 송(Sung)을 침공하였다.

그들의 제1군은 우구데이의 둘째아들 쿠텐(Godan 원문)이 1236년에

사천(Czechwan)을 침공하여 성도(Chengtu)를 빼앗았고,

제2군은 우구데이의 다른 아들 쿠추(Kuchu)와 테무이(Temui)가

1236년 3월에 호북(Hupeh) 양양(Siangyang)을 점령하였고,

제3군은 구운 부카(Kun-buqa)와 차가안(Chaghan)이 지휘하여

장강[양자강: Yantze)]에 있는 오늘날의 한구(Hankow)에서 하류를 따라

황주(黃州: Hwangchow)까지 진군하였지만 버틸 수가 없었다.

1239년에는 양양이 다시 송(Sung)으로 넘어갔고,

이렇게 해서 사실상 45년 전쟁(1234∼1279)이 시작된 셈이다.[위의 책, p.376]



이 내용을 보면 송(宋: Sung)을 3개 군이 침공했고,

고려에는 1개 군이 침공했다는 말이 된다. 그 군사가 몇 명이든 간에.
그런데 이 시기를 다시 보면 고려에는 1231. 12부터이고, 송나라는 1234년부터이다.

바로 이 1234년은 금(金: Kin)나라가 몽골군에 의해 멸망한 해이다.
문제는 우구데이[太宗]의 지휘하에 고려가 침공을 받았다. 이 우구데이는 어떤 일을 하였는가?

 

 



(3) 칭기스칸은 1227년에 죽기 전까지, 중앙아시아의 내륙지역을 정복함으로써

광범위한 유라시아 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John K. Fairbank, Edwin O. Reischauer, Albert M. Craig,

Eds., East Asia : Tradition & Transformation, Revised Edition,

1978; 김한규·전용만·윤병남 옮김,『동양문화사』(을유문화사, 1998), p.208]

 

 


(4) 세계의 전지역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몽고와 터키의 혼성부대가 1231년에 페르시아를 짓밟고,

1258년에는 바그다드에 있던 아바드의 칼리프 왕국(Abbassid Caliphate)을 멸망시켰다.[위의 책, p.209]

이 자료를 보면, 고려를 침공했던 동일한 시기에 몽골군대는

고려(한반도라면)와는 정반대되는 페르시아 지역으로 침공을 했다.
물론 이런 가능성의 력사를 전개했으니, 어떤 규모인가를 보자.

 

 

 



(5) 4개의 칸국: 부족의 관행에 따라, 칭기스칸은 정실부인의 네 아들에게 제국을 분할해 주었다.


(a) 대칸(Great Khan)[동아시아]: 오고타이(=우구데이; 칭기스칸의 셋째아들: 1229∼1241)/

몽커(蒙哥·Monke: 1251∼1259)/쿠빌라이(忽必烈·Khubilai: 1260∼1294)

(1279년 이후 중국전체를 지배)/1368년에 明에 의해 중국에서 축출됨.


(b) 차가타이(Chaghatai: 터키어로는 Djakhatai)칸국: 차가타이(察哈台: 칭기스칸의 둘째아들, 1227∼1242)/

1370년 이후 서부가 티무르(Timur 帖木兒: 1336∼1405)에 병합됨.


(c) 페르시아(Persia)칸국(IL-khan): 훌라구(旭烈兀·Hulegu)에 의해 건국됨/

1258년 바그다드(Baghdad)를 점령/1335년에 멸망됨.


(d) 킵차크(Kipchak)[黃金群落]칸국: 볼가강 하류지역에서 바투(拔都·Batu: 1227∼1255)에 의해 건국됨/

러시아를 지배함/티무르 제국에 의해 정복되었다가 15세기에 멸망됨.[위의 책, pp.208∼209]

 

 



이 내용은 칭기스칸의 아들 2명과 손자 2명으로 구성된

아시아를 분할하여 봉토하였으며, 그 범위가 동유럽까지이다.

이 어마어마한 광활한 지역을 얼마나 많은 군사로써 담당했을까?

아마도 전체 군병력은 20만 명을 넘지 않았다고들 한다.

대개 15만 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개 지역에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대단한 기동력과 파괴력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들이 네 아들에게 제국을 분할통치하려고 했던 의도와 전략에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구데이가 통치했던 시절에 아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에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기동력과 파괴력을 동시에 발휘해야 하는 시점에

지리적으로 동쪽 끝과 서쪽 끝의 실행은 전략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칭기스칸 때부터 위의 (3)에서 보면, 중앙아시아 내륙지역 정복에 목표가 서있었다.

그쪽으로 국력/국방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의 고려와의 관계를 다시 보자.

 

 



(6) 동아시아에 있던 그들의 군대가 북중국(1241년)과

고려(최종적으로 정복된 해는 1258년)에 대한 정복사업을 완수하고 있을 무렵,

서아시아의 몽고군은 서쪽으로 향해 힘을 폭발시켰다.

바투의 지휘하에 그들은 모스크바(Moscow)를 불태우고,

키예프(Kiev)를 엄습하고, 폴란드·

보헤미아·헝가리와 다뉴브강 유역(1241)을 침공하였다.

그들은 유라시아의 거대한 초원 지대의 서쪽 끝

아드리아해(Adriatic Sea)까지 다다랐다.[위의 책, pp.209∼210]

 

 



이 글을 보면 질문이 나온다.

그것은 "동양사에서 고려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5만 명도 채 되지 않는 병력으로 북중국을 점령하고,

서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이

동유럽을 강타하여 지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사실로 보고서 (1)과 같은 전쟁이 과연 가능한가?
전략가·전술가들은 제대로 된 전쟁이 가능한 설명을 해야 한다.

"충격과 공포"의 심리전으로 가능할까?

전쟁의 원칙에 "병력/화력의 집중의 원칙"이 있다.

물론 "분산의 원칙"도 있다. 어떤 때에 이들이 가능한가?
더구나 1230년대에는 몽골군대는 전력을 다하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로 병력을 집중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몽골은 처음부터 동아시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동경 105도 중심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서쪽으로

알타이산맥을 너머 동경 75도가 중심이 되는

중앙아시아의 북쪽 넓은 지역에 있으면서

그 지역과 서아시아 지역을 장악했던 것이다.
그리고 (5)에서 보듯이 고려조정이 정복되었다는

1258년이 가까워진 시기에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6) 1253년에 그들[몽골]은 운남(雲南: Yunnan)의 대리(大理:Tali)에 수도를 둔

비중국계 왕국인 남조(南詔: Nan-cho)를 접수함으로써,

이 지역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구성한 부분으로 만들었다.

남송정복은 칭기스칸의 가장 유능한 쿠빌라이(1215∼1294)의 치하에서 완성되었으니,

그는 1260년에 대칸(大汗)이 되어 34년간 통치하였다.[위의 책, p.211]

 

 

 


(7) 그 다음해(1259년)에는 강화도의 조정이 몽고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270년까지는 개성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몽골에 대한 산발적인 저항이 127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미 아시아의 대부분과 동유럽의 많은 부분을 짓밟고,

중국정복을 거의 마무리할 단계에 있었던 몽고는 한국(=고려)에서

견고한 지배력을 확립하였고, 그들은 (한)반도의 북부를 병합하였고,

몽고의 공주를 고려에 거듭 출가시킴으로써 고려왕실을

사실상 몽고지배하의 한 지파로 만들었으며, …

왕실의 가족조차도 고려에서보다는 북경(北京)에서 거주하는 일이 많았다.[위의 책, p.374]

 

 



쿠빌라이가 장강 남쪽을 침략해가고 있는 그 때에,

같은 시기임에도 고려를 함께 유린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반도가 고려가 아니라,

분명 동일한 중국대륙 지역이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리고 (7)은 몽골의 지배적 영향에서 고려가 통치력이 약해졌을 뿐이지,

조정의 지배력이 무너진 것은 아니며,

몽고의 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내온 것은

"몽고의 지배하"가 아니라, 몽고가 고려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이 커졌으며,

고려조정이 그들에게 대우를 더 잘해주었다고 보아야 한다.
과연 몽골이 고려에 무엇을 했고,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사실은 다음 기회에『고려사』에서 확인해 보이고자 한다.

 

 

 

출처 : 청심사달
글쓴이 : 청심사달 원글보기
메모 :